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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대탐험] 1. 고구려 성의 기원

축성법 유사한 유적지 중국서 발견돼
역삼각형 성벽·반원형 마면식 치 눈에띄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 자연성벽 위용 자랑

 

 

고구려는 700년 동안이나 중국을 위협한 위대한 ‘성의 나라’이다. 중국 내 강변을 끼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고구려성이 존재하고 있다.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위치 선정과 자연절벽을 이용한 방어위치 선정, 옹성과 치를 비롯한 체계적인 방어구조물 등은 한마디로 천하의 요새, 바로 그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한 고구려의 성벽이지만 당대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구려성을 넘지 못했다.

 

특히 고구려성은 중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한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700년 고구려 역사의 증인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700년 역사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이러한 증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태자하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지만 1천500년 전 이곳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천하를 풍미했던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말발굽 소리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아 부활의 시기를 고대하고 있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고구려 석성의 기원
2.천혜의 요새 봉황산성-환도산성
3.평지토성 국내성-하고성자성
4.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
5.역사왜곡의 현장
6.훼손되는 고구려 유적지
7.연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8.구리의 아차산성

 

 

 

중국 내몽골자치구인 적봉시 인근에서 고구려성 축성법과 닮은 기원전 24~1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삼좌점 유적지와 성자산산성이 발견됐다.

이들 요하 고대문명 유적지는 고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와 일치하고 성 축성기술 등이 고구려성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미뤄볼 때 한민족의 선조가 요하 상류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했거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문화공동체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 요하문명에 대한 발굴은 한민족의 기원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이다.

‘천혜의 요새’ 고구려 700년 위상 엿보다

◇삼좌점(三座店)

중국 내몽골자치구인 적봉시에서 북서쪽으로 40㎞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 2005년 음하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된 삼좌점은 기원전 24~1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으로 2006년 말께 발굴이 완료됐다. 이 석성은 국가 단위의 조직이 아니면 쌓을 수 없는 규모와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석성의 구조가 전형적인 고구려성인 요령성 등탑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위치한 백암성과 매우 유사하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한 성곽,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인 치(雉),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한 공법,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키 위해 여장을 축조한 모습 등은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법이다.
 

 

 

 

삼좌점은 성벽 중 내성 북쪽 성벽의 ‘치’가 5m 간격으로 13개나 눈에 띌 정도로 매우 규모가 큰 성이다.

삼좌점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천여㎡ 규모로 60여채의 집터,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석축 저장공, 곡식창고, 통로에 설치된 문설주 등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완벽한 형태의 우물,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곽,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으로 쌓은 축성술, 투박하나마 가공 흔적이 있는 성벽돌 등은 고구려 특유의 축성술이어서 마치 고구려성의 기원을 보는 것만 같다.

이러한 축성술은 고구려와 백제에 이어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적지 내 곳곳에는 지금도 빗살무늬 토기 조각과 각종 돌 연장 등만이 나뒹굴고 있을 뿐 전쟁 무기나 곡식 등 생필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볼 때 적의 침략에 대비한 산성이었다기 보다는 행정관청의 역할을 담당한 평지성이란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복기대 연구원은 “성벽의 높이와 치의 간격, 축성술 등을 보면 요령성 인근에 있는 고구려 성인 백암성을 보는 것만 같다”며 “이뤄 미뤄볼 때 삼좌점 유적의 주인공들이 고구려, 즉 우리의 선조로 추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다.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중국 내몽골자치구인 적봉시에서 오한기(敖漢旗)로 들어가는 길목에 성자산 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성자산산성은 북쪽으로 합라구촌(哈라溝村)에서 약 4㎞ 정도 떨어져 있다.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성자산산성의 유지군(遺址群)은 6.6㎢ 규모에 달하며 지난 1987년 발견됐다.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로 해발 800m인 성자산 주봉의 정상부는 아(亞)자형으로 불규칙하지만 남북 440m, 동서 폭은 340m, 총 면적은 약 15만㎡나 된다.

정상에 오르면 서요하 상류 일대의 초원 사막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며, 주위에는 계단식 성벽이 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 이중 성벽은 주로 맥반석으로 축조됐으며 기초 폭은 약 15m,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약 2m이며 외성과 내성에 각각 5개의 문이 설치됐다.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이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등이 눈에 띄었다.

특히 외성 주위에는 고구려 성벽의 고유물로 알려진 반원형 마면식(馬面式) 치가 남아있다. 또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은 성벽은 고구려 성벽의 축조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내성은 중심구를 비롯해 동.서.남.북.동남 등 6구역으로 분할됐으며, 구역과 구역 사이는 서로 돌담으로 격리했지만 돌문으로 연결돼있다.

중심구역은 다른 구역보다 높은 지역에 있으며 ‘회’(回)자형의 오르내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돌담의 길이는 88~93m이며 현재 1m 높이의 담이 남아 있다. 내측 돌담의 길이는 30m이며 돌담 내에서 고위층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10여개의 건축지가 남아있다.

중심구 외의 5구역 내에는 균등한 원형돌담이 몇 개 단위로 분포돼 있으며, 각 구역 안에는 10여개의 건축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가운데 동남구역에서 발견된 건축지가 73개에 달하는 등 총 6구역에서 232개의 건축지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형 건축지의 직경은 주로 5~6m이며, 최장 13m에 달한다.

특히 동쪽 성벽 바깥에는 위 부분이 매끄럽게 연마된 3개의 대형 제단이 놓여있다.

중국측은 성자산산성을 20세기 말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 중에 하나로 평가,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백암성(白巖城)

요령성 등탑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위치한 고구려 석성으로 1천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백암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자락 끝에 쌓았기 때문에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으며, 남쪽은 태자하라는 강가에 깎아 지른듯한 절벽이 있어 자연성벽을 이루고 있다.

성의 남쪽으로는 태자하(태자하)가 흘러 천연 자연해자(해자)를 이루고 있어 성벽을 쌓지 않았고, 동·서·북 삼면은 험준한 지형을 따라 잘 다듬은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총 길이가 2.5km에 달하며, 성벽의 높이는 5~8m, 너비는 2~3m이다.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약 5m 높이의 장대가 있고, 장대 주위로 내성(속칭 아성·牙城)을 쌓았다.

산꼭대기 장대에 올라서면 멀리 태자하와 성 아래 마을과 넓게 펼쳐진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절벽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여서 천혜의 요새가 따로 없다.

현재 동벽과 북벽이 대체로 잘 남아 있으며, 특히 북벽에 설치한 3개의 치(雉)는 완벽하게 남아 있어 고구려성 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첫 번째 치에서 두 번째 치까지는 61m, 두 번째 치에서 세 번째 치까지는 55m 간격이다. 치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네모나 반원형으로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을 말한다.

성벽은 허물어지긴 했지만 높이가 5.2~5.5m 정도이고, 제일 높은 곳은 9m가 조금 넘는다.

특히 엄청난 성벽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 밑의 받침돌(9~10층)은 쌓아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 쌓는 굽도리식(퇴물림)으로 쌓았다. 계단식으로 경사지게 굽도리식 쌓기를 한 모서리는 타원형으로 다듬어 직선인 윗부분과 조화를 이뤘다.

백암성은 고구려 양원왕 3년(서기 547년) 가을에 개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적어도 이 연대보다 훨씬 이전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자문: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복기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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