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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요동지역과 집안 일대에 분포하는 고구려 산성들이 대체로 수 ㎞에서 10㎞가 넘는 것들인데 반해 임진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들은 높지 않은 곳에 작은 규모로 축조됐다.
현재 한강 이북지역에서 발견되는 40여 개의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둘레 400m를 넘지 않는 소규모의 보루들이다. 그 중 100m 내외의 것들이 가장 많으며, 비교적 큰 규모가 200~300m이며, 400m가 넘는 것은 아차산에 있는 몇 개의 보루와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정도이다. 따라서 성이라기 보다는 보루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고구려의 보루들이 이처럼 소규모인 이유는 많은 인원을 동원해 점령한 지역에 대한 정치·경제적인 통솔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군사작전을 펼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임진강 유역에 있는 고구려 관방유적(關防遺蹟)은 모두 10여개에 달한다. 관방유적은 군사적인 방어시설에 대한 총칭으로 성이나 보루, 봉수 등을 말하는데 지형적으로 높지는 않더라도 남쪽을 향해 넓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축조돼 적의 움직임을 쉽게 관측할 수 있고, 공격과 방어에 유리한 전략적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천의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이다.
이들 3개 성은 임진강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고, 임진강이나 한탄강이 사행곡류하면서 강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도하하기 쉬운 길목에 축성됐다. 특히 임진강 일대의 현무암 대지가 하천침식으로 인한 주상절리(柱狀節理) 현상으로 형성된 자연단애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으며, 동쪽부분만 지상구조물로 성벽을 구축한 것이 특징이다.
3개 성 가운데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은 호로고루성이었으며 다음으로 당포성, 은대리성 순이다. 이는 고구려의 중심부인 평양·개성 방면에서 한강유역 일대로 접근하는 가장 빠른 교통로가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호로고루성 앞의 고랑포를 건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곽 곳곳에 숨어있던 고구려 절개를 만나다
◇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의 고랑포 북변에 위치한 호로고루성은 약 28m 높이의 삼각형 현무암 수직단애(垂直斷崖) 위에 축조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호로고루성이 위치한 곳은 임진강과 지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임진강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고구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역할을 하였으며, 현무암 대지를 따라 형성된 10m를 넘는 단애는 공격의 장애물이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임진강을 따라가다 보면 석벽이 없는 지점이나 도강이 편리한 여울목 지점은 공격의 루트이자, 전력을 기울여 사수해야할 방어의 대상이기도 했다.
임진강은 호로고루 동쪽의 두지나루에서부터 크게 곡류하면서 이곳에 이르면 강심이 얕은 여울목을 이루는데,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임진강 하류쪽으로는 강폭이 넓고 강심이 깊어진다. 따라서 이 여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호로고루성은 전략적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호로고루성의 전체 둘레는 401m 정도이다. 그중 남벽은 161.9m, 북벽은 146m, 동벽은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이 89.3m이고 진입로 부분을 포함하면 93.1m에 달한다. 성 내부의 전체규모는 2천평 가량이지만 성벽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과 외곽 일부를 제외하면 사용가능한 면적은 약 1천600평 정도이다.
동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부분에 남-북 방향으로 축조된 유일한 지상구조물로 높이 10m, 하단부 폭 40m, 길이 90m 정도이다. 남벽은 임진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석벽이다. 동벽이 설치된 곳부터 삼각형 성의 꼭지점에 해당되는 지점까지는 161.4m에 달해 세 성벽 중 가장 길다.
이곳은 현무암의 주상절리(柱狀節理) 현상에 의해 11~13m 높이의 단애가 형성돼 있으며, 암반층 위에서부터 지상까지 4~5m 두께의 점토퇴적층을 돌아가면서 편축방식으로 성벽을 쌓았다. 남벽의 기울기는 약 80°정도로 수직에 가까워 적이 침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북벽은 남벽처럼 절벽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평균 약 40° 정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절반 정도는 60° 이상의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북벽 앞에는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개울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성내로 출입하는 시설은 현재 진입로로 이용되고 있는 동벽 남쪽부분에 유일한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삭평되어 건물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성의 외곽부분에 초석으로 보이는 방형의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성내에 많은 양의 와편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의 중간부분은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와편들이 특히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건물들이 훼손되고 난 이후 성의 중간부에 주로 후대의 건물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호로고루의 정확한 축성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성벽의 판축토 내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고려할 때 대략 4세기 말경에 토루나 목책 등 초보적인 형태의 방어시설이 구축되었다가 국경이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임진강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지배가 이뤄지는 시점에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된 듯 하다.
또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상실하게 되는 시점은 대략 고구려의 멸망시점임을 고려하면 4세기 말부터 7세기 후반까지 대략 250년 정도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당포성(堂浦城)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위치한 당포성은 삼화리에서 마전리로 가는 당개나루터 동쪽의 현무암 수직단애 위에 축조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이 성은 임진강의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과 임진강 대안 단애 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축조돼 기본적인 형태가 호로고루성이나 은대리성과 거의 같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뤄진 당포성은 약 13m 정도 높이의 단애 위에 축조됐는데 성의 서쪽끝에서 내성까지의 길이는 200m이며, 높이는 6m, 길이는 50m 정도이다.
내성에서 70m 거리에 있는 외성은 높이 4m, 길이 150m이나 동쪽부분이 평탄하고 서쪽부분은 경사면으로 형성돼 있다.
외성의 상당부분이 훼손됐는데 훼손된 성벽의 단면에서 많은 양의 와편이 출토됐다. 이곳에서 출토된 와편은 어골문을 주로하는 고려시대 이후의 와편으로서, 이 외성벽은 내성벽과는 전혀 별개의 구조물임이 밝혀졌다. 내성벽의 경우 판축구조물 위에 석축을 한 호로고루성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석축으로 쌓았으며, 유사한 점은 체성벽을 보축했다는 점이다. 현재 성벽이 무너진 지점에 체성벽의 일부가 노출돼 있다. 노출된 외벽은 폭 2m, 높이 1.6m 정도이며,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쌓았다.
특히 입구부분 성벽 동쪽부분엔 면석이 노출된 곳이 있는데 돌틈 사이에서 신라계의 기와편들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뤄 당포성은 고구려에 의해 초축되고 신라에 의해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중 분포빈도가 가장 높은 것이 와편이다. 와편 중에는 회흑색의 선조문계통 와편과 격자문·어골문·무문와편 등이 있으며 승문와편도 발견됐다. 토기편은 황갈색 니질의 고구려토기편도 일부 발견되지만 회청색 경질토기류와 주름무늬병, 덧띠무늬병 등 8~9세기에 일반화된 신라계의 유물이 주종을 이룬다.
◇ 은대리성(隱垈里城)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은대리성은 한탄강의 북안에 돌출돼 있는 단애의 한쪽 끝을 막아서 만든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으로, 삼각형 모양이다. 성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400m 정도이고 지상구조물인 동벽의 길이가 120m 정도여서 전체 규모는 952m에 달한다. 성의 내부면적은 약 7천평 정도이다.
성의 남쪽은 한탄강과 접해 50~60m의 수직 단애가 형성돼 있고 북쪽으로는 15~20m 정도의 단애가 40°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 동쪽부분을 제외한 다른 방면으로는 성으로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다.
유일한 지상구조물인 동벽은 높이 6m, 기저부의 폭 10m, 길이 120m 정도이지만 성벽은 상당부분 무너져 내려 북쪽으로 가면서 높이가 2~3m 정도 낮아졌다.
성벽은 토석혼축으로 쌓았는데 양쪽 기단부만 석축을 하고 안과 기단 윗부분은 토축을 하였다. 토축부분이 쉽게 무너지는 것으로 보아 판축방법으로 축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점토를 다져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동벽은 남벽에 비해 경사가 완만한 북벽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성벽의 길이는 120m 정도이다. 북벽은 현재 높이 2m, 폭 5m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성내부는 평탄지이다. 성내에서는 수습되는 유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수습된 유물 중 일부는 고구려토기편으로 회색연질이며 표면에는 점열문이 찍혀있다. 와편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신답리고분
신답리 고분은 2기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한탄강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밭에 위치하고 있다. 1호분과 2호분 모두 지상에 무덤방을 조성한 지상식이다. 1호분의 봉토는 평면 형태가 원형으로서 무덤 기저부는 동서 19.4m, 남북 19m, 높이 3m이며 2호분은 동서 7.7m, 남북 6.3m 정도로 봉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호분은 평면이 방형인 현실과 현실 앞쪽의 오른쪽 방향에 현문부와 연도, 묘도를 갖춘 구조로 되어 있다. 현문부는 길이 80cm, 너비 80~90cm, 높이 110cm정도로 바닥에 현무암재 판상석 2매가 깔려 있었다. 현문부 남단에서 연도 남단까지는 길이 310cm로 이중 북쪽 150cm는 현실과 동시에 축조된 1차 연도이며 남쪽 160cm는 추가장시 이어붙인 연도로 추정된다.
묘도는 1차 연도의 남단 바닥시설 아래에 물려있는 판상석에서 봉토의 남단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으며, 현실바닥에는 판상석을 깔았고 바닥재 위를 회로 미장했다. 벽석을 쌓을 때도 벽석 틈에 자갈이나 현무암 부스러기를 채우고 회반죽을 발랐으며, 현실 천장은 후벽 위에 얹혀있는 판상석을 통해 삼각고임식으로 만들었다. 2호분도 지상식으로 평면 방형의 현실과 현실 앞쪽의 중앙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도가 확인됐는데 현실바닥에는 판상석이 깔려 있었으며 벽석 사이의 틈은 작은 돌로 메웠다.
연도는 현실 남서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약 30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며 잔존 연도의 길이는 약 190cm 정도이다. 2호분에서는 묘도 등의 다른 구조는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신답리 고분의 특징은 주로 현무암을 이용해 석실을 지상에 축조했고 현실 평면형태를 방형으로 조성했다. 또 석실 축조시 대형 판상석을 사용했으며, 바닥시설로 판상석을 깔고 그 위에 벽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1호분에서만 나타난 특징은 석실 축조시 회를 많이 사용했고 현실의 천장을 삼각고임식으로 만들었으며 현문부를 폐쇄하고 다시 연도를 폐쇄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