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이 상존하는 경마에서 무사히 정년을 채우고 은퇴한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요.”
경마계에 뛰어든 지 48년째인 박덕준 조교사가 오는 6월말 은퇴한다. 18세란 앳된 나이에 경마계에 뛰어들어 40여년을 종사한 만큼 남다른 감회가 있을 법도 한데 무탈하게 마친 경마인생을 고마워했다.
그는 1960년 기수로 경마와 인연을 맺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절, 그저 ‘밥술이나 먹고 가족 생계는 챙기겠지’하는 어린 생각이 그토록 먼 여정의 길을 떠난 첫 발인줄은 몰랐다.
머리에 서리가 앉은 듯 백발이 된 박 조교사는 서울경마공원 경주로를 바라보다 지나간 세월이 파로노마처럼 펼쳐지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기수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을 회고한다면 아마도 체중과의 싸움을 들 수 있겠지요”
키 171cm로 당시론 큰 축에 속했던 그로선 51~52.5㎏의 부담중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인내의 연속이었을 터.
지금이나 예전이나 적은 체중을 선호하는 조교사 생리 상 무거운 체중 기수는 곧 퇴출을 의미한다.
마냥 먹어도 먹어도 배속은 ‘꼬르륵’소리가 나던 시절 무작정 굶었다.
만약 그가 그런 고통을 감내하지 못했다면 오늘은 없었을 게다.
1975년 5월. 14년간 정들었던 기수복을 벗고 경주로의 감독인 조교사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기수 때처럼 말의 심장 박동과 내 맥박이 하나 돼 터질 것 같은 전율은 느낄 순 없었으나 내가 조교한 말이 경주에 나가 우승하는 걸 보는 순간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조교사 전성기는 뚝섬 경마장에서였다.
1985~1987년 3년 연속 40승 고지를 밟으며 명장의 반열에 우뚝 섰다.
그 후에도 승승장구를 거듭했으나 2000년 11월 ‘용천검’이 금지 약물 복용으로 약 6개월 간 조교 정지 처분을 받은 사건은 시련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자비스’가 당시 최고 활약을 펼치던 ‘언어카운티들리’, ‘스페셜러’ 등을 제치고 마주협회장배에 우승을 차지한 것은 또 하나의 반전이었다.
그는 유독 외산마와 인연이 많다.
첫 대상경주 우승을 가져다 준 ‘한계돌파’, 그랑프리의 영광을 안겨준 ‘훌라밍고’, ‘자비스’가 모두 외산마다.
후배 조교사들에게 들려준 말은 “말의 습성을 맞춰주는 게 중요하다. 선행마는 순발력을 키워주고, 추입 마필은 체력을 키워주는 등 말의 습성을 맞춰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그는 마주로서의 출발로 인생 3막을 준비하고 있다.
“경마를 떠난 인생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올 가을 조교사가 아닌 마주로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