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는 한마디로 한나 아렌트의 ‘지적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아렌트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주제들이 20세기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아렌트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그것을 이해하고 사유하고자 하는 치열한 고투 속에서 나온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의 가장 심오한 정치적 통찰들은 유대인 무국적자로서의 자기 경험에서 출발해 전체주의와 강제수용소의 공포와 대결하는 필생의 과정을 거쳐, 진정한 정치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이 책 속에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인간의 조건’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거쳐 ‘정신의 삶’으로 이어지는 한 위대한 정신의 삶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저자는 나치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파국을 맞은 20세기 유럽 역사에 대한 탐구를 유대인 파리아(pariah, 국외자·불가촉천민)와 유대인 파브뉴(parvenu, 졸부)에 대한 아렌트 자신의 중요한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구분은 프랑스계 유대인 사상가 베르나르 라자르(Bernard Lazare)에게서 아렌트가 전유한 것으로서 그녀는 라헬 파른하겐(19세기 ‘베를린 살롱’의 여주인)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이 개념을 사용했다.
독일계 유대인 동화 정책의 실패를 탐구하기 위한 개념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렌트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이 개념이다. 아렌트는 라헬 파른하겐의 전기를 쓰면서 사회와 정치, 즉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깨닫게 되는데, 이 구분은 이후 그녀의 모든 후속 작업의 중심 개념이 된다. 또한 파브뉴와 파리아의 구분, 특히 ‘의식적 파리아’라는 라자르 개념의 전용으로 인해 아렌트는 하이네, 라자르, 카프카, 채플린으로 이어지는 파리아 유대인의 ‘숨겨진 전통’을 발견하고 독립적인 사상가로서 자산의 정체성을 정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