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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회, 사회적 기업 향한 이미지 쇄신 박차

3개 경마공원 체계… 작년 2천여만명 고객 입장
말산업육성법 국회 통과 계기 말 산업 육성 주력
독거노인 밑반찬 배달·농어촌 돕기 등 지속 봉사

 

■ 90년 역사의 한국경마

들판을 거침없이 질주하며 자유를 만끽하던 말이 인간에게 포획돼 길들여지기 시작한 역사는 길다. 말은 초기 농경용이나 들짐승을 잡기위한 사냥수단에서 수송과 전쟁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발달로 기차와 자동차에게 역할을 넘겨주었고 무기개발로 인해 전쟁터에서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인류의 영원한 동반자로 남을 것 같았던 말은 서서히 도태돼 갔고 서서히 우리 겉을 떠날 채비를 꾸렸다. 그러나 경마란 스포츠를 통해 화려한 부활을 했고 우리나라에도 서구식 경마가 도입된 지 어언 90년이란 세월을 헤아린다.근현대사의 세월 속에 말은 ‘경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우리 민족과의 또 다른 의미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현재는 매년 2천만 명 이상의 고객이 찾는 인기스포츠로 자리 잡은 ‘경마’의 90년 역사를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 우리나라 경마의 도입 초기 단계

우리나라의 서구식 경마는 1898년 5월28일 구 동대문운동장 자리인 훈련원 광장에서 열렸던 관립 외국어학교 연합운동회의 나귀경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1914년 4월3일 용산 구 연병장에서 조선공론사가 주최한 조선경마대회가 10만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최초 경마이나 축제행사 성격을 띠어 새로운 풍물 소개에 그쳤다.

민간에 의해 꾸준히 개최해온 경마대회는 1922년 4월5일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의 설립으로 최초 공식적인 경마시행 법인이 탄생해 같은해 5월20일 첫 공식 경마대회를 열어 이날을 ‘경마의 날’로 정했다.

이듬해 승마투표제도 공인으로 경마는 전국으로 확산돼 주요 도시에서 경마대회를 개최하지 않는 곳이 없었고 1920년대 후반에는 전국 지방도시의 경마구락부가 20여개에 달했다.

1930년대에 들어선 관람객도 증가했다.

1933년 1월1일 조선경마령의 시행으로 모든 경마가 법규에 따라 시행되는 등 공인시대로 접어든 경마는 해마다 성장을 거듭했고 중일전쟁 이후엔 군정(軍政)과 마정(馬政) 후광까지 입어 경마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민간마사단체의 단일화를 꾀하던 조선총독부는 1942년 2월14일 조선마사회령을 공포, 종래경마단체를 해산시키고 그 권리의무를 마사회가 승계했고 조선마권세령을 공포, 우리나라 경마에 처음으로 마권세를 부과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조선마사회의 일본 경영진의 인수를 수락한 한국 승마인들은 미군정 당국의 승인을 얻어 회명을 한국마사회로 변경하고 인수단의 최고령자인 나명균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1945년 10월20일 당시 경마의 메카였던 신설동 경마장에서 광복 후 첫 경마를 개최했다.

광복 직후 국내 주요 인사였던 이승만, 김구, 신익희, 조소앙, 최동오, 조병옥 등은 신설동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은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는 열성을 보였다.

요인들의 경마장 방문이 늘어나자 마사회 측은 이승만 박사상 ,백범 김구상 등 특별경주를 실시하기도 했다.

광복 후 꾸준한 성장세에 있던 한국 경마는 1950년 6.25전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1953년까지 약 4년간 긴 휴면기에 접어들었다.

전쟁 중 신설동경마장이 비행장으로 징발 사용되면서 한국마사회는 경마재개를 위해 1954년 5월8일 뚝섬경마장을 개장, 한국경마의 맥을 이었다.

◇ 경마의 산업화

우리나라 경마가 처음으로 해외무대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1960대다.

한일친선경마와 국제친선경마 등의 개최에 힘입어 1970년 9월에는 정식 ARC 회원국이 되는 기쁨도 누렸다.

덕마흥업이라는 민간회사와 마사회가 이원화해 운영되던 경마운영체제가 1972년 마사회의 단일운영체제로 바뀌고 국력의 비약적인 성장과 국민소득 수준 향상에 따라 레저산업의 활기로 경마도 급성장해 광복 후 30여년 만에 우리나라 경마는 비로소 성장궤도에 올라섰다.

198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5회 아시아경마회의(ARC)는 국내 경마사상 초유의 행사로 한국 경마의 성장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한국 경마의 해묵은 숙원사업이었던 발매, 환급 등 투표관리업무의 전산화를 이뤄 경마 현대화의 새 장을 연 것은 1984년이었다.

◇ 과천경마장과 제주경마장, 부산경남경마장의 개장으로 본격적인 경마시대로 진입

뚝섬경마장 시대는 1989년 9월1일 경기도 과천의 35만평의 부지에 현대식 시설의 서울경마공원을 개장하면서 36년간의 막을 내렸다.

이후 1993년에는 경마계의 숙원사업이었던 개인마주제를 도입해 원활한 경마시행과 공정성을 강화했고 마필수급체계 개선과 국산마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1990년대에는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된 제주 조랑말 보존을 위해 제주경마공원이 개장했고 2005년 부산경남경마공원이 신설돼 현재의 3개 경마공원 체계를 갖췄다.

개인마주제 도입이후 한국경마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여 2010년에는 매출액 7조5천억원, 입장 인원 2천100만명으로 세계 7위 수준으로 도약했다.

◇ 경마에 대한 이미지 쇄신과 사회적 기업을 향한 한국마사회의 노력

한국마사회는 2000년대 들어 공기업으로의 사회적 책임을 담당하기 위한 갖가지 시도를 시작했다.

KRA Angels 봉사단이 그 대표주자로 지난 2004년 전 임직원들을 참여하는 봉사단체로 출범시켰다. 이들 봉사단은 독거노인 도시락 밑반찬 배달, 농어촌 일손돕기, 수해복구, 사랑의 연탄 나눔 등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보듬었다.

또 에티오피아에서 공동우물 시공하고 의료봉사와 기증의류 전달 등의 해외봉사활동까지 그 영역을 확대했다.

2005년부터는 농어촌지역을 대상으로 복지차량을 전달해 어려운 처지에 놓인 농어민을 도왔다.

또 경마공원을 국민에게 사랑받은 장소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이어져 서울경마공원에 2009년 복합문화공간 갤러리 마당을 개장했고 봄, 여름, 가을 등 계절마다 온갖 축제로 나들이객을 즐겁게 했다.

한국마사회는 2011년 2월 말산업육성법의 국회 통과를 계기로 말 산업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경마가 많은 국민들이 즐기는 레저스포츠임에도 대다수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괴리감을 없애기 위함이다. 마사회는 말 산업 육성으로 각종 지원책을 펴 농가소득을 올리고 승마를 통한 말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져 경마가 더욱 사랑받는 스포츠로 거듭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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