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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들] 김정렬 나전칠기 명장

명장의 고집과 열정이 나전칠기 맥 잇다

“나는 대한민국의 청정한 바다에서 나오는 패(貝)들...그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채가 담겨 있어 이를 표현하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 나전칠기 김정렬(57)명장이 수십 년 간 한 길을 걸으며 그동안 느껴왔던 일에 대한 소명을 밝히고 있다.

 

글 /이상열기자 sylee@kgnews.co.kr

 

 

 

통영나전칠기 명장 안창덕 선생에게 사사

김 명장은 1954년 경상남도 고성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김 명장의 어머니는 통영세무서에 직원으로 근무했고 주변사람 중에서 어머니의 필체와 자수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곧바로 김 명장에게도 전해져 “누나들과 자수를 만들어 보리쌀 한 말과도 바꾸곤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가 정식으로 나전칠기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충남 서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에 있는 야간재건중학교에 들어서서 부터다.

당시 통영나전칠기 보유자로 유명했던 안창덕 선생에게 김 명장의 어머니가 손수 자신을 맡기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줄 것”을 당부하며 가족들과의 이별이 시작됐다고 한다.

김 명장은 가족들과 떨어져서 통영나전칠기를 전수 받는 당시를 “어린나이에 너무도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라며 그 때를 떠올렸다.

그가 가족들과 이별의 아픔을 잊고 칠기에 빠져든 이유는 “자개로 만든 상에 밀가루와 참기름으로 광을 내는 일을 처음 맡아했는데 그 광채가 너무 아름다워 반하게 됐다”며 “그 매력에 도취돼 현재의 나를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최연소 나전칠기 명장 거쳐 무형문화재로 지정

김 명장은 17세의 이른 나이에 당시 통영나전칠기를 사사받던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소질을 인정받아 공방의 책임자에 오르며 전통칠기의 계승자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김 명장은 대한민국 칠기의 전통을 보존하며 이어가는데 끊임없는 시간과 노력, 집념과 연습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김 명장은 1992년 전국 공예품 대전에서 여러 출품작들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출품된 작품의 주제는 ‘한의 폭발’이다.

김 명장은 “부모님과 형제, 누나들과의 떨어져서 고생했던 어린 시절을 한으로 표현했다”며 공예품대전에서의 대상작이 된 작품배경을 말했다.

또 1993년 전국기능경기대회 나전칠기부문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명실상부한 칠기의 장인으로 부상하게 됐다.

이어 김 명장은 나전칠기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이 알려져 1996년 대한민국 최연소 전통 나전칠기 명장에 올랐고 뒤이어 1998년에는 무형문화재까지로 지정돼 우리고유의 전통을 지키려한 김 명장에게 인간승리를 맛보게 했다.

이렇듯 김 명장이 대한민국의 칠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떠오르자 이곳저곳에서 사업에 대한 합작제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에 김 명장은 “당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전통칠기에 대한 순수성을 포기할 수 없어 모두 거절했다”며 “금전관계가 들어가면 혼이 깃든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사업으로 인해 변질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을 지켜왔다.

 

 


칠기문화 배울 수 있는 전수회관 건립이 꿈

현재 김 명장은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에서 약 20여 평 남짓한 공간을 얻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활과 작업을 함께하고 있다. 또한 손수 자신이 걸어온 칠기의 길을 여러 하수생들에게 직접 사사하고 있다.

이처럼 김 명장과 사사생들이 쓰고 있는 현재의 공간은 서울의 잘 차려진 전시홀 또는 전시실과는 전혀 비교할 바 못되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김 명장은 불편한 기색 없이 자신의 기술전수를 위해 오늘도 땀 흘리고 있다.

김 명장은 제자들에게 “작품은 타고난 기질보다 자신의 깊은 마음에서부터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눈앞의 일들에 급급해 한다면 절대 우리의 전통을 이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묵묵히 인내하고 고집해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칠기 전수에 대한 마음가짐을 표현했다.

김 명장은 자신이 가진 “소원 한 가지가 있다”고 부끄럽게 말을 꺼내며, 그것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의 칠기문화를 경기도 북부권에서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다”고 전통문화에 대한 계승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김 명장은 자신을 믿고 함께해온 아내와 특별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바로 ‘나전포도무늬 이층장’이다. 지난해부터 몰입해온 이 작품은 부인 박숙미(50)씨의 혼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김 명장은 말하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이 같이 작업한 이 작품은 오는 9월에 열리는 부천 무형문화재 엑스포에 전시키로 했다.

김정렬 명장의 전통을 고집하는 정신과 칠기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우리나라의 나전칠기가 세계 속에서도 우뚝 서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나전칠기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중국공예미술사에는 중국의 주(周)代에 출현했고 전해진다. 그 후 당(唐)나라 때에 성행하였다가 송(宋)나라 때에 쇠퇴기를 맞았다.

한국의 나전칠기는 중국의 당나라로부터 기능이 전래되었다고 믿어지고 있으나 고분출토 유물을 볼 때에 나전칠기의 역사는 이미 1세기경 낙랑시대(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를 거쳐 백제와 신라, 삼한시대에 시작됐다고 추측된다. 특히 고려시대의 나전칠기가 몹시 발달해 송나라의 문인과 묵객들이 고려의 필갑을 선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정교하고 품격과 예술성이 높아 고급공예로 인식되었으나 조선시대(17~18세기)에 와서는 일반화되면서 쇠퇴기해지고 나전의 문양이 사군자나 화조(花鳥) 등으로 변화하였다.

중국에는 ‘조칠기법’과 일본은 ‘시회기법’, 한국은 ‘나전기법’이 각각 발달했다. 19세기 초에는 끊음질이 성행하여 옛 고려의 나전기법이 되살아났고 십장생과 산수화 풍경의 사실적 표현들이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근래에는 경남 통영에서 성행하였으나 서울을 위주로 전국에 분포되었다. 1980년을 넘어서면서 나전칠기가 급격히 기계화됐고 소비가 줄어들면서 지금은 소수의 나전칠기 장인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기능보유자 김정렬(金正烈)

△ 1954년 경남 고성 출생

△ 아호 : 천봉(泉峰)

▲주요경력

△1968년 경남통영시 문화동 나전칠기 입문. 안창덕선생 사사 △1992년 전국 공예품대전 대상수상 △1993년 전국 기능경기대회(나전칠기) 1위(금메달) △1996년 대한민국 명장지정. 칠기 제 96-19호, 대통령표창 △2001년 제5회 직업능력 개발촉진대회 종합 1위. 철탑산업훈장 △2003년~2008년 전국기능경기대회(나전칠기) - 심사장 △2006년 전국 공예품대전 심사위원 △2002년, 2007년 (사) 정부조달 문화상품협회 부이사장 △2008년 경기북부명장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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