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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열전] 정철민 신아엔지니어링 대표

 

성공한 인생은 무엇일까? 대통령, 검사, 대기업 임원 등 단순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적 명예를 통해 한 사람의 성공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아쉬움이 따른다. 지극히 평범할 수 있지만 걷던 길을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지금 이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복에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자기만의 노하우로 사업적 성공은 물론 행복을 찾고 있는 46살의 젊은 CEO가 있다. 정철민(46·부천시 소사구) 신아엔지니어링 대표는 4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소기업의 대표다. 수 천억원의 자산가도, 권력을 갖진 관료도 아니지만, 지금 이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정철민 신아엔지니어링 대표의 약 20년 간의 삶의 노하우를 들어본다.

“인생 성공 90%는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에 달렸다”

글 l 홍성민기자 hsm@kgnews.co.kr 사진 l 최우창기자 smicer@kgnews.co.kr

23살 불량소년, 부천으로 상경하다

어린시절 정철민 대표는 불량 청소년이었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7살이 되던 무렵, 돌아가신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졌고 정 대표의 비행은 시작됐다.

나이트웨이터를 하며 비교적 모범적인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정 대표의 청년기는 대부분 학교와 집보다는 경찰서에 다녀간 적이 더 많았다.

“가끔 고향친구를 만나 중소기업의 대표로서 일을 하고 있다면, 대부분 그 사실을 믿지 못하거나 놀라워합니다. 그만큼 고향에선 심각한 불량학생이었죠.”

23살이 되던 무렵, 정 대표는 문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언제까지 철없는 방황을 계속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방황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수 만리 떨어진 부천으로 상경하기로 결정했다.

고향을 떠난 정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하지만 안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금형회사. 청년 정 대표는 그곳에서 엔지니어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얼굴과 손에는 기름때가 마를 틈이 없었고 밥 먹듯이 하는 야근은 당연스러운 하루의 일과였다.

고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 대표는 금형분야의 전문가로 자신도 모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졸린 눈을 부릅뜨고 도면공부를 했습니다. 지우개를 표본삼아 도면대로 깎아 보기도 하고, 금형과 사출에 대한 이론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죠.”

이러한 노력을 시기하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흘린 땀만큼 목표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것 같아 더욱 힘이 났다고 정 대표는 당시를 회상했다.

공든 탑과 같이 쌓은 신뢰는 무너지지 않아…

부천에 상경한 지 8년이 되던 해, 정 대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배운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금형관련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 때가 1995년, 정 대표가 31살이되던 해였다.

당시 정 대표가 창업을 위해 마련한 돈은 처갓집에서 빌린 700만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신아엔지니어링은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넘쳐나는 주문량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1990년 중반 제조업은 큰 호황을 맞아 금형, 사출 등의 발주가 넘쳐났기 때문으로, 정 대표는 주·야간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주문으로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정 대표는 섣부른 판단으로 과욕을 부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하루에 제조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주문량을 받았다.

이는 거래처가 믿고 맡겨준 일에 대해 약속한 납품일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제품을 공급해야 한다는 정대표의 지론 때문으로, 신아엔지니어링이 매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다.

당시 금형 및 사출 업체들은 무리하게 주문량을 수주하다, 납기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거래처로부터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손해배상청구 등으로 부도사태로 이어지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금형서 조립라인까지 통합화로 경쟁력 확보
 

 

 


신아엔지니어링이 다른 금형 및 사출업체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금형, 사출, 조립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현재 대부분의 부품회사들이 하청업체를 통해 완제품 생산을 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같은 일관된 라인을 통해 부품을 생산하는 것은 관리의 시스템화를 통한 불량률 제로화라는 시장경쟁력을 확보한 셈이다.

사업시작 7년차를 맞은 2002년 신아엔지니어링은 우선 금형라인과 사출라인을 통합시켰다.

분업과 아웃소싱 등으로 산업구조가 세분화된 시점에서 정 대표의 고정관념을 바꾼 과감한 경영방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후 8년이 지난 2010년 현재에 이르러서는 금형, 사출에 이어 조립라인까지 확보했다.

“금형, 사출, 조립을 모두 다른 곳에서 하다 보니 거래처들의 불만이 높아졌습니다. 완성된 제품이 불량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어느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는지 책임소재가 불분명했기 때문이죠.”

이같은 기술경쟁력을 바탕으로 신아엔지니어링은 괄목할만한 매출 성장세를 이뤄냈다.

창업당시 5천만원에 불과했던 연매출이 2002년에는 20억원으로 급성장했고, 최근에 들어서는 30~40억원의 안정적인 매출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신아엔지니어링의 주요 생산품목은 전자, 통신, 양변기제품 등이며, 화분받침대, 필통 등은 직접 완제품을 제작한다.

위기에서 빛난 성공 노하우

신아엔지니어링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2000년 엠씨스퀘어 등을 제작하던 거래처 A업체가 저가로 밀고 들어오는 중국업체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사태로 이어졌다.

A업체와 거래하던 신아엔지니어링이 당시 받지 못한 돈은 3억원 정도. 직원들의 월급을 우선 지급한 탓에 제품을 만들 원재료 구입비가 모자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는 정 대표가 얻은 신뢰 덕분으로 부도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정 대표는 500만원 정도의 운영자금을 대출 받기 위해 한 금융기관을 찾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규모가 작았던 신아엔지니어링은 대출담당직원으로부터 매몰찬 거절을 당했다.

“당연한 일이죠. 창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업체를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겠어요.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라는 것을 깨달았죠.”

대출담당직원은 대출을 거절했지만 정 대표는 오히려 직원들의 급여 거래은행을 대출을 거절했던 곳으로 이동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더 깊은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정 대표의 숨은 경영 노하우가 느껴지는 일화다.

금융기관으로부터 얻은 이러한 신뢰는 자금난이 발생한 신아엔지니어링에게 은행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러한 정 대표의 인생관은 직원들의 인사관리에도 녹아있다.

정 대표는 회사에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직원보다 그렇지 못한 직원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다고.

정철민 대표는 “인생에 있어 성공의 90%는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에 달려있다”며 “회사를 경영하는 대표의 자리에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지만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 지는 것처럼 이러한 노력은 아주 큰 기회로 되돌아 올 수 있다”고 성공에 대한 노하우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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