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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전혜경 원장

실력과 열정으로 농민 위한 일에 전념… 소통과 탈권위가 강점
한식세계화연구단장 시절 농진청 위상 세계에 알려
부친 전승규 전 농촌영양개선연수원장 가르침이 오늘의 나 있게해

 

“농업인·국민과의 소통이 한국농업발전의 초석입니다”

글 l 이창남기자 argus61@kgnews.co.kr 사진 l 최우창기자 smicer@kenews.co.kr

계약직에서 국내 3명뿐인 여성1급 공무원이 되기까지


오는 12월 16일 임기 1년을 맞는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전혜경 원장(51)이 최근 소통 농정을 강조하고 나서 주목된다. 전 원장은 지앤아이피플과의 취임 1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식량원장으로서 그 동안의 업무 성과와 나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식량원장 취임 전인 지난 2009년 9월부터 전 원장은 농업과학원 농식품자원부장으로 재직했다. 전 원장의 주 전공 분야는 식품이다.

 


농진청의 전통 연구기관인 식량원이 전 원장에겐 생소했다, 그래서 전 원장은 벼 육종과 연구 개발 분야에서 무조건 처음부터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히려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 긍정의 발상인 셈이다.

“벼 육종 및 재배 분야는 그 동안 제가 익숙했던 식품 연구 영역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나 원장으로서 300여명이 넘는 식량원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해선 저부터 변하지 않았으면 안 됐어요. 식량원 발령이 제겐 오히려 농진청과 한국 농정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는 고마운 기회였습니다.”

전 원장은 원래 농진청 계약직으로 시작해 1급 공무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지난 1984년 농촌영양개선연수원 지도사 근무를 시작으로 그의 공직 생활은 시작 됐지만 앞이 보이질 않았다.

식품 분야가 전공이기 때문에 업무에는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 직원과 차이를 두거나 특혜를 바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업무에 있어선 지독 하리 만치 철저하고 꼼꼼하게 프로의 자질을 십분, 후회 없이 발휘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학벌과 여성, 집안 배경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농진청 조직 내에서 자신이 승진을 거듭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시선은 단호히 거부했다.

전 원장은 “아버지(전승규 전 농촌영양개선연수원장)께서는 늘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시는 분이셨다. 국록을 먹는 공무원으로서 자식이 같은 조직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어떠한 배려도 없었다. 오직 실력과 열정으로 농진청과 농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집안에서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전 원장의 가정은 부모님이 모두 직장 생활을 하면서 넉넉하진 않지만 가정부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자식과 함께 전 원장이 있으면서 아버지(전승규)의 말이 떠올랐다며 부끄러웠던 과거를 회상했다.

전 원장은 “아버지는 절대 남과 자신을 비교해 우월감을 갖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격적으로 보고 출신과 경제력으로 구분해 보는 순간 판단은 흐려지고 공직자로서 올곧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충고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원칙 때문인지 전 원장은 아버지와 같은 근무지에 있으면서 주변의 이목을 받았지만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9년 동안 농촌영양개선연수원 근무를 마치고 그는 농촌생활연구소에서 연구관, 가정경영과장으로 농진청에 몸담았다.

이후 농산물가공이용과장으로 지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동안 있으면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농진청 조직의 핵심인 연구정책국 수장 자리를 맡게 됐다.

농진청 조직은 평범하지만 묵묵히 한 길을 걷는 전 원장의 잠재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더욱 더 험하고 생소한 길로 내보냈다. 하지만 전 원장은 이를 계기로 더욱 성숙한 농진청 식구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고, 특히 지난 2008년 10월 자신의 전공 분야인 한식세계화연구단장에 임명됐다.

전 원장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동분서주하며 농진청의 연구 기술 개발 성과를 한식과 접목해 농진청의 대내외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후 22대 김재수(현 농식품부 1차관) 청장 재임 당시 농진청의 전통 연구 핵심 기관인 식량원의 사령탑을 맡은 것이다. 정부 기관 중 여성 1급 공무원은 전 원장을 포함해 현재 3명이다. 당시 여러 언론 매체들이 경쟁적으로 전 원장의 영전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초점에 뒀다.

그러나 전 원장은 이런 세간의 관심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여성이라는 편견과 선입견이 오히려 조직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좋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래서 전 원장은 원장 취임과 동시에 300여 식량원 직원 간 터놓고 소통하며 행동하는 창의적 마인드 형성을 강조해 왔다. 그가 주재하는 회의, 참석하는 행사엔 권위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통해 전 원장은 식량원의 연구 성과 및 역량의 시너지 창출을 위해 몰입했다. 원장이든 계약직이든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전 원장은 늘 아래를 내다보며 자신이 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때가 오면 농진청과 한국 농업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고, 식량원에 있는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라고 전 원장은 밝혔다. 그는 “남은 임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로지 식량원, 농진청 후배들이 정말 신바람 나고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농진청과 식량원에서 저의 사명에 부족함 없이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농업시대 구현을 위해 농진청, 식량원은 더욱 더 농민과 국민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 전 원장은 당당했다. 자신감과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비상 할 때와 떠나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한국 농업과 농업인의 행복을 견인하는 농진청과 식량원을 만들어 나가는 과제는 지금도 내일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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