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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cess & Life] 양인석 성광학교 이사장

장애아 교육의 代父 사재 털어 헌신…
“학교는 내 인생의 전부”

글 ㅣ 이동현 부국장 leedh@kgnews.co.kr

 

 

“학교앞에 하늘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쪽방을 차리고, 네식구가 새우잠을 자던 시절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인생추억이 됐습니다” 교사직업을 팽개치고 전 재산을 털어 반평생을 장애아 특수교육에 헌신해 온 양인석(76)성광학교 이사장은 “남들처럼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살려고 했으면 이 짓 안 했을 것”이라며 “장애아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자신의 꿈이 헛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하남시 성광학교는 하남·성남·구리·남양주시 등 경기동부권의 정신지체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교육기관이다. 양인석 이사장은 24세때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시작으로 광주 분원초, 산곡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교사직을 접었다.

지난 1970년 당시 중등과정인 동부실업학교를 설립 개교한 이래, 그 자리에 지금의 성광학교를 1985년 개교했다.

그 사이 양 이사장의 2세교육 투신은 벌써 4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교육계에서는 그를 장애아 교육의 대부(代父)로 부른다.

학교를 세운 뒤 사재를 몽땅 털어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시대조류에 맞는 교재를 직접 제작 고안하는 등 장애아 교육에 헌신한 그를 달리 부를 말이 없다.

양 이사장은 “내가 돈 생각했으면 학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100명이 넘는 우리 아이들(학생)들을 보면, 저절로 고생한 보람이 생긴다”고 했다. 양 이사장의 간곡한 뜻을 따라 아들 태진(42)씨 부부가 학교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양 이사장은 “되돌아 보면 파란만장한 교육사업이었다”면서 “부모를 탓하지 않고 열심히 아이들을 돌보는 아들부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교육은 투자없이 불가능 한 것”이라며 “우리 가족의 교육투자가 사회의 작은 등불이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양인석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40년에 걸친 자신의 교육사업을 투자라는 의미로 솔직담백하게 토해냈다.

무조건 뛰어든 교육사업

어린시절 하남시 교산동 샘재마을에 살았던 가족들이 막노동을 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도화동 곡사포부대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마을이 강제철거 되면서 ‘죽어도 고향가서 죽자’는 부친의 뜻에 따라 샘재마을로 되돌아 왔다.

당시 강동구 상일동의 상일고등공민학교에 다니고 싶어 어머니를 졸랐으나 ‘돈드는 학교는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그는 ‘공부 안시켜 주면 죽는다’고 협박해 겨우 겨우 월사금(수업료)을 타 낼 정도로 간신히 중등과정을 마쳤다.

미7사단에서 군속생활을 하며 학비를 벌어, 서울대문리대사범대학을 어렵게 마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사 초임발령을 받았다.

교사발령은 이후에 교육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경기도 광주로 근무지를 옮겨 분원초와 산곡초에서 3년씩 모두 6년을 근무했다.

당시 6학년을 맡았던 그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 중학교 진학률이 형편 없었다.

제자들이 학비가 없어 더 이상 배울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가 1970년 현재의 자리에 중등과정의 동부실업학교를 세웠다.

1972년 20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학교는 이후 1985년 성광학교로 이름을 바꿔 특수학교로 자리했다.

사재 다 털어 대부(代父)역할

“만약 학교를 안 짓고 기숙학원을 만들었더라면 돈 벌고 출세했을 텐데…, 그렇지만 난 한번도 후회해 본 적없어요”

양 이사장은 학교를 확충하려고 시내 노른자위 땅을 몽땅 내다 팔아 건물을 신축했다.

성광학교 설립때는 조상들이 남겨 준 교산동의 논 밭을 팔아 보탰다.

양 이사장은 “지금 그 땅 그대로 있었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돈 벌자고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하단다. 순종형의 부인이 그렇고, 자식들까지 학교에 모두 묶어 뒀으니 ‘애비로서는 빵점’이라고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6천700㎡(약 2천169평)의 학교부지가 남원 양씨 종친회 부지였다.

학교가 커지자 종친회는 땅값으로 7억원을 요구했다.

학교가 돈을 잘 버는 줄 알았던 종친회를 겨우겨우 설득, 5억원의 빚을 떠 안고 학교부지를 매입했다.

성광학교는 현재 학생 170여명에 특수교사와 보조교사 등 9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양 이사장은 1991년 미국 하와이 아일랜드대학교에서 명예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도전은 실패

그에게는 더 큰 야망이 있었다.

바로 정계진출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1995년 하남시장 선거에서 무소속 출마를 계기로 이후 3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모두 낙선했다.

“요즘 정치인들은 입만 가지고 다니면서 밥 얻어먹고 선거운동 하지만, 그 당시에는 돈 없으면 선거에 나올 수 없었다”고 했다.

네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때 마다 금융기관으로부터 신용대출을 받아 선거를 치뤘다.

16대 자민련 후보로 국회의원에 입후보 했을 때, 정당연설회에 참석한 청중들이 워낙 많아 꼭 당선될 줄 알았는데 여지없이 떨어졌다.

“주위에서 당선가능성이 높다며 1억원을 빌려 주었다가, 선거에 패하자 그 다음날 아침부터 찾아와 돈 갚으로라고 한 일이 있었다”면서 “그 돈을 여러차례 나눠 갚느라고 꽤 고생했다”고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특히 “두 번째 시장 출마를 앞두고 지역의 후배가 찾아와 양보해 달라고 해 조건없이 양보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양보하지 않고 내가 출마했더라면 시장에 당선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번에 걸친 정치도전은 그렇게 번번히 실패했다.

“평생 교육자로만 살라고 한 하늘의 뜻인지 몰라도 정치와는 결실의 끈을 맺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 출마와 관련, “내 덕이 부족해 떨어진 것”이라며 “당선 됐으면 지역발전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남문화원장직 마감

지난 8년동안 하남문화원에 쏟아 부은 열정은 대단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현장을 누볐다.

60세 이상 실버노인들을 위해 만든 한글서예반과 수지침 강의는 인기가 높다고 소개했다.

하남의 독특한 문화를 접목한 ‘남한산 나무꾼 길싸움놀이’는 한국문화인연합회가 전통문화창달 공을 인정해 지난해 수상작으로 선정돼 상을 받았다.

하남시민의 날 기념행사를 위해 무용극도 개발했다.

도미와 아랑의 사랑을 연구해 만든 연극은 하남시민의 날 식전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 연극은 하남시 무용협회에서 관내 초·중·고를 대상으로 시범공연을 통해 확산시키고 있다.

“문화원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라며 “올 6월 이후 임기가 끝나면, 능력 있는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라고 했다.

효(孝)교육 실종 한탄

우리사회가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면서 효 교육 실천이 어려운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마치 이 사회가 효 교육을 보수의 상징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효 교육이 학생들한테 먹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 때문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들 마저 효교육에 대해 부정적”이라며 “효교육이 안되면 바른교육은 멀어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효 교육의 상실 이면에는 비뚤어진 사회가 한 몫하고 있다고 꼽았다.

“요즘 학생들 욕 못하면 왕따 당하는 현실에서 시급하게 서둘러야 할 교육과제가 바로 효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양 이사장은 지난 2010년 하남시가 추천한 교육부문 공로 문화상을 수상했다.

성광학교 이사장은 업무추진비 한 푼 없는 명예직이다.

자녀들이 주는 용돈으로 부부가 생활하고 있다.

그는 기름값 아끼느라 자식들이 마련해 준 승용차를 두고, 문화원을 걸어서 출퇴근 한다.

양인석 이사장은 1985년 개교 당시 코로나 승용차로 학생들을 직접 실어 나르며, 특수학교에 대한 강한 애착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손길로 이루어진 성광학교는 2세 교육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내 인생의 사진과 같은 존재”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뽀얀 먼지가 가득한 책장속에서 꺼낸 흑백앨범을 넘기며 “부(富)를 버리고, 내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 말끝을 맺었다.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보람은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양 이사장은 자신의 마을 이름을 따 교산(校山)이라는 아호를 쓰고 있다.

가르침을 받는 산처럼 우뚝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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