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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3월의인물] 홍원식, 박노규

국가보훈처는 93주년 3·1절을 맞아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경기도 발안에서 계몽운동과 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일제의 제암리교회 만행으로 순국한 홍원식 선생(1877.10.13~1919.4.15)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박노규 육군 준장(1918.3.14~1951.3.3)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홍원식(洪元植·1877.10.13~1919.4.15) 선생

우정·장안면서 대대적 연합만세운동
사지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애 발휘

 

 

홍원식 선생은 당시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 출생해 대한제국 서울시위대 제1대대 서소문병영에서 근무하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충남 등 각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등과 ‘구국동지회’를 결성, 신교육운동 등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세함성이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수원지역에서도 대규모 연합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홍원식 선생은 안종후, 김성렬, 이정근 선생들과 함께 3월31일 발안장터에서 일본인 상점 등을 상대로 거센 투석전을 벌였다.

이는 식민지 정책을 등에 업고 경제력을 장악해 가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생존권 수호의 발로였다.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발포와 진압으로 이정근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격분한 홍원식 선생은 4월3일, 발안과 연계한 우정·장안면의 연합만세운동을 대규모로 펼쳤다.

 

일제는 4월13일 13명의 보병을 이끌고 발안에 도착해 제암리 진압을 시작했다.

일본군 아리타 중위는 15일주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이고 홍원식 선생을 포함한 약 20여명의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한 뒤 교회 밖에서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불을 지르고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제암리교회는 총성과 함께 불타오르며 시커먼 연기가 주변 하늘을 덮었다.

홍원식 선생은 주민 20여명과 함께 제암리교회에서 순국했고, 뒤늦게 현장에 달려온 선생의 부인 김씨도 일본군의 총격에 희생됐다.

독립을 위해 활동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홍원식 선생 부부는 순국한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노규(朴魯珪·1918.3.14~1951.3.3) 육군 준장

이화령 전투 지휘땐 동료 시신 업고 싸워
책임감 투철… 敵 시체 1천구 묻어주기도


 

박노규 준장은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이 패망하자 국군에 입대했고 1946년 11월 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박 준장은 여수·순천 반란사건 진압작전에 투입됐었고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1949년 6월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로 전보, 한국 전쟁을 앞두고 북한군과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박노규 준장은 강원도 홍천의 제6사단 2연대 부연대장으로 재임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박 준장은 1950년 7월 이화령전투에서 대대를 지휘, 적 800여 명을 격멸했고 전투 지휘 중 전사한 김용하 대위의 시신을 업고 싸우며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어용산 전투에서는 적군의 시체 1천여구를 묻어 주는 등 따듯한 인간애를 발휘한 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화령 전방의 633고지를 방어하던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각종 포병의 지원 아래 짙은 안개를 이용해 돌격을 강행한 적과 백병전을 전개, 어쩔수 없이 이화령 쪽으로 후퇴하게 됐다.

당시 박노규 준장은 633고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쪽 능선을 따라 역습을 감행했고 후퇴하던 인접대대의 병사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33고지 일대에서 혈투를 벌이던 제2대대가 퇴각하는 적을 차단함으로써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박 준장은 춘천 및 홍천 전투, 강릉 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조림산 전투에서 부상으로 병원에 후송될 때는 “부상을 당해 더 싸우지 못해 조국에 미안하다”며 “곧 완쾌되어 전선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책임감이 투철한 지휘관이었다.

박 준장은 1951년 3월 일월산전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을 섬멸하던 중 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산화했다.

정부는 박노규 준장의 이와 같은 공적을 기려 1951년 4월 대한민국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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