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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생부 김노경(한성판윤 시절), 1824년 과천 주암동 돌무께에 별장인 과지초당(瓜地草堂=청관산옥(靑冠山屋))을조성했으며 추사, 북청 해배(解配)과지초당에서 말년 4년 거주했다. 과지초당은 정원과 숲의 빼어나고 연못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추사 가문의 절정의 역량을 상징하는 곳이다.말년의 예술적 완숙인 불이선란도, 판전(板殿), 대팽고회 대련 등 작품을 남겼다.
과천시와 과천문화원은 지난 2004년 과천시와 과천문화원은 추사 김정희 재조명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고, 그 성과를 일반 시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현단계에서 추사 작품을 활용한 추사 문화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이해를 높이고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문화상품을 개발·보급함으로써 그 성과를 널리 알리고 있다.

현재 과천시 소장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다양한 표현해 족자와 캘린더, 문화소품 등으로 문화상품화를 추진 중이다.

과천시의 대표적인 문화원형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생애 말년 과천시에 거주하며 예술 활동을 벌였다.

예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503여 종에 이르지만 우리에게는 추사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노경(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됐다가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 1836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돼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됐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돼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했고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예술가적 추사 김정희

김정희의 예술은 시, 서, 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지만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됐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다.

▲추사 김정희와 과천의 관련성

추사 김정희(1786.6.3~1856.10.10)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생부 김노경(한성판윤 시절), 1824년 과천 주암동 돌무께에 별장인 과지초당(瓜地草堂=청관산옥(靑冠山屋)) 조성했으며 추사, 북청 해배(解配) 후(1852 10.9~1856 10.10) 과지초당에서 말년 4년 거주했다.

말년의 예술적 완숙인 불이선란도, 판전(板殿), 대팽고회 대련 등 작품을 남겼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과천에서 생활한 이유로는 생부 김노경은 익종이 대리청정을 할 때 김로, 홍기섭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행사하고,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김우명의 상소로 인해 1830년 지돈녕부사 재직 중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됐다가 1833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를 지낸 뒤 1837년에 생을 마감한다.

김노경 사후인 1840년에 김홍근이 유상도의 옥사를 재론해 관작이 추탈되고 김정희는 북청 유배에서 해배(解配)돼 삭탈관작된 생부 김노경(1766∼1837)의 복권을 위해 한양에서 가까운 과천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의 유래

과지초당은 1824년 생부 유당 김노경이 한성판윤 시절 청계산 북쪽 옥녀봉 아래 돌무께에 마련한 별서(別墅:별장) 겸 묘막(墓幕)으로 마련됐다.

과지초당은 정원과 숲의 빼어나고 연못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추사 가문의 절정의 역량을 상징하는 곳이다.

1837년(헌종 3)에 김노경이 별세하자 추사는 부친의 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玉女峰) 중턱 검단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뤘고 그 후 과천을 자주 찾아 과지초당에서 보내는 시일이 늘어났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 3) 8월 이후 1856년 10월 10일 서거하기까지 말년 4년간을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자료제공 = 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과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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