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8 (일)

  • 구름많음동두천 28.7℃
  • 흐림강릉 34.2℃
  • 흐림서울 30.3℃
  • 구름많음대전 32.3℃
  • 구름많음대구 33.9℃
  • 맑음울산 31.5℃
  • 구름조금광주 30.8℃
  • 맑음부산 30.7℃
  • 구름조금고창 31.7℃
  • 맑음제주 31.8℃
  • 구름많음강화 27.8℃
  • 구름많음보은 32.1℃
  • 구름많음금산 31.5℃
  • 맑음강진군 31.0℃
  • 구름조금경주시 33.6℃
  • 구름조금거제 29.2℃
기상청 제공

5. 평택 ‘지영희 선생’

 

 

청년 지영희는 식민지 근대의 격변기를 보내며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구근대음악에 맞서 자신의 음악이 어떻게 당대의 사회와 조화를 이뤄 낼 수 있을지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리고 그때의 깨달음과 경험은 교육자가 되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평택시와 평택문화원의 문화원형은 인물 ‘지영희’ 선생이다.

지영희 선생은 한국근대음악역사와 한국사회의 큰 음악가다.

한국음악예술의 정신과 음악의 정체성을 온 몸으로 이 땅에서 실현하고, 새로운 근대성으로 창작과 연주, 교육과 연구로서 큰 정상을 이루며 다음 세대에게 가장 큰 영향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가 1909년에 태어나 1980년까지 살다간 시기는 국권상실과 국권회복운동의 시기이자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강점과 민족문화의 해체, 그리고 분단과 민족음악, 6.25와 4.19로 이어지는 아픔의 시기 속에서 한국음악계의 창작·연주·교육분야에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

지영희 선생은 이 기간 크게 다섯 시기를 분기점으로 음악적 삶을 전개했다.

첫 번째 시기는 그가 태어난 1909년부터 1937년까지의 시기로 학습시기이고, 두 번째는 1937년 12월 18일 한성준이 창립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주로 기악단원으로 활동하며 그의 음악세계를 구체적으로 적용한 시기다.

세 번째는 1945년 해방이되면서 민족음악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며. 네번째는 1960년부터 1974년까지 15년간으로 국내외에서 연주가·작곡가·편곡가·지휘자·교육가 등으로 활동하던 ‘창조적 내성기’다.

다섯 번째 시기는 1974년 하와이로 이주해 그곳에서 병환으로 생을 마감한 1980년까지의 7년간 회환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지영희 선생과 근대의 문화적 공간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의 필요에 의한 근대화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어서 일제의 군홧발 아래 억지 춘향식 근대화가 진행됐고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근대는 상처와 공포만으로 군림하지는 않았다. 1920~30년대 근대 도시의 한편에서는 힘에 대한 동경 또한 강렬했고 근대는 단순히 개념적 차원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전환을 의미했다.

전통사회의 예술과 구분지을수 있는 근대의 가장 새로운 현상 중 하나는 ‘대중’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일단 ‘대중’의 개념이 유입되자 예술가들은 불특정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예술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 레코드 시장이 확대되고 경성방송국이 개국되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식민지의 이윤창출을 위해 뛰어든 기업들은 소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1930년 이전까지 유성기 음반의 약 90%가 판소리, 민요 등의 전통음악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제 전통예술은 과거 고정적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유통방식으로 연행되는 극장, 레코드의 존재방식에 길들여져야 했다.

실제로 1930년대의 이른바 ‘판소리 부흥운동’에서 대중매체의 발달이 큰 몫을 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그것은 대중매체가 이들의 명창성을 인정해주고 보장해주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통예술을 담당했던 예술가 입장에서도 유성기 음반을 녹음하거나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명창대회 및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얻는 물질적·정신적 보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진보를 거듭하고 있던 대중매체의 빠른 파급과 서양을 통해 근대화를 경험하게 된 조선인들은 서구음악을 근대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전통음악을 부정하는 해체작업이 근대 엘리트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조선의 민요 혹은 유행가는 과거지향적이거나 죽음·슬픔 등을 노래한 한편 서양의 재즈나 민요는 미래지향적이거나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 많다는 생각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다. 특히 1920년대 후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서양영화 ‘몽 파리’는 음악으로도 경성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다.

1929년 5월 24일부터 단성사에서 상영됐던 이 영화는 모던걸의 새로운 패션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몽빠리’를 부르는 것이 ‘모던걸’들이라고 기사화 될 정도로 영화는 주제가로도 발매됨으로써 가일층 서양음악의 파급속도는 증가했다.

▲지영희 선생 음악의 근대성

해금과 피리산조의 창작자이면서 경기음악과 민속음악 전 분야에 능통한 명인이었다. 선생의 음악적 궤적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삶은 전통과 현대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며, 민속음악의 자리매김을 위해 평생 분투하였다. 지영희의 삶은 전통음악의 근대성을 추적할 수 있는 구체적 증거다.

그가 해금과 피리, 태평소뿐만 아니라 호적, 양금, 대금, 농악, 무용장고와 춤에 이르기까지 민속예술에 능통했다는 것은 그의 부친 지용득이 세습무 출신이었다는 전통사회의 음악환경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선생이 청년이 될 즈음 경성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전통공연문화가 설 자리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청년 지영희는 식민지 근대의 격변기를 보내며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구근대음악에 맞서 자신의 음악이 어떻게 당대의 사회와 조화를 이뤄 낼 수 있을지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리고 그때의 깨달음과 경험은 교육자가 되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지영희 선생과 국악관현악단

한국 음악사에 있어 최초의 민간전통음악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 중?고등학교의 전신)가 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1960년 3월 5일, 우리나라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한국 민속음악(기악, 성악, 무용, 각종 연희종목 등)을 주로 교육하는 이 학교는 한국음악의 현대화를 위한 여러가지 작업을 실행했다.

전통음악을 교육해 보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지만 미래를 대비하고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국악을 창작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 인식되어 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는 과정을 논의하게 된다.

당시 학교는 부설로 ‘국악발전연구소’를 설치했는데, 연구소의 여러 가지 사업 중 국악관현악단의 창설도 들어있었다.

당시 학교에는 많은 원로 국악인들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수차례에 걸쳐 ‘국악발전연구소’의 회의에 참석해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았다.

당시 ‘국악기는 대체로 독주악기이다.’, ‘국악은 실내음악이다.’ ‘악기수가 적지 않은가, 양악기에 비해 소리가 너무 작다.’, ‘서양 악기처럼 화음이 잘 이루어질까’ 등의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수개월을 연구한 결과, 단점들을 하나하나 보완해가며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