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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대 왕 ‘태조’여기에 잠들다

 

 

 

 

 

 

7.구리 ‘동구릉(東九陵)’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의 문화원형은 ‘동구릉’이다. ‘동구릉’이란 동(東)자가 방위를 나타내는 의미로 東(동녘 동), 九(아홉 구), 陵(구릉 릉)자를 썼는데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아홉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지게 됐다.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산 2-1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국가지정사적 제193호로 지정됐으며 우리나라 최대의 능침지로써 검암산 자락(‘검암’이라 함은 바위가 없거나 적다는 뜻)의 191만5천890여m²의 넓은 대지위에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계비 83위중 17위의 유택(왕 7명, 왕비 및 계비 10명)이 모여 있는 왕릉군이다.

조선의 왕릉 총 50개 중 북한에 10개, 남한에 40개가 있는데 구리시에 9개의 능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동구릉’은 능제의 변화와 조선왕조 500년의 부침(浮沈-시세의 변천)을 한눈에 보고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더욱이 능 전역에 우거져 있는 숲과 능역을 가로지르는 개울물 등 빼어난 경관까지 갖추어져 있어 생태학습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옛날에는 능을 경복궁에서 100리(40㎞)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1408년 5월 24일(태종8년) 사망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능 자리를 물색하던 중 당시 검교참찬 의정부사를 지내던 김인귀가 추천하고 영의정부사 하륜이 결정해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이곳은 태조 임금의 능인 건원릉이 검암산 자락에 안긴지 올해로 598년째이고 태종8년(1408년) 9월 9일 이곳 검암산의 동남쪽 자락에 태조 임금을 모신후로 조선왕릉의 종가로서 1대를 시작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 14대 선조와 왕비 의인왕후 박 씨, 계비 인목왕후 김 씨,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 씨,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 씨,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 씨, 24대 헌종과 왕비 효현왕후 김 씨, 계비 효정왕후 홍 씨, 추존왕 수릉의 조성으로 ‘동구릉’이라 불리어 지게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동구릉’이라 불리어 지지 않고 1, 5, 14, 18, 16대까지 ‘동오릉’으로, 20, 21대까지 ‘동칠릉’으로, 24대 경종과 추존왕 익종(문조익황제)의 수릉이 1855년 철종 6년에 마지막으로 조성되면서 ‘동구릉’으로 굳어지게 됐다.

그리고 모두 ‘능’이라 불리워 지는게 아니라 능은 왕, 왕비, 계비, 원은 왕세자, 세자비, 왕의 사친(왕을 낳은부모)을 묘는 옹주, 공주, 대군, 폐위된 왕(예: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들에게 불리워지며 조선능제의 특이한 사항과 형태는 단릉(單 陵)-한 산등성이의 곡장 내에 봉분이 하나인 단일능호(예:건원릉·휘릉·혜릉·수릉), 쌍릉(雙陵)-한 산등성이의 곡장 내에 봉분이 2개인 단일능호(예: 원릉·숭릉), 삼연릉(三連陵)-한 산등성이의 곡장 내에 봉분이 3개인 단일 능호(예: 경릉),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같은 둔덕에 곡장이 다르게 각각 봉분이 있는 단일 능호(예: 현릉·목릉), 합장릉(合葬陵)-한 산등성이에 봉분이 하나로 곡담에 쌓여 있으며, 2구 이상의 시신을 둔 단일능호(예: 수릉)으로 조성됐으며 삼연릉의 형태는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24대 헌종의 경릉밖에 없다.
 

 

 

 

 


그리고 좋은 혈을 모은 사초지 위에 봉분이 있는 것과 곡장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국장이 일어나면 임금님은 5개월 안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5월 24일 날 승하한 태조 이성계는 25일 날 소렴하고 26일 대렴해 후별실청에 빈전을 정하고 남쪽으로 머리를 뒀는데 118겹의 옷을 입고 여름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석빙고의 얼음을 채우고 마른미역으로 습기를 막았다고 하는 야사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미역의 양이 많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시장에 몰래 내다팔아 일반백성들이 사다 국을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으며, 국상이 나면 미역 값이 내려갔다 해 ‘국상 중 미역 값’ 이란 글귀가 후대에 까지 전해져 온다.

건원릉을 조성할 당시 산릉도감에서 충청도 3천500명, 황해도 2천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천명의 군정을 동원했다.

건원릉에는 특이한 3가지가 있는데 봉분을 억새로 덮은 것과 사초지를 오르면 3단에 정중앙석인 네모난 돌이 박혀있고 신도비가 있다는 것이다.

억새를 덮은 것은 태조의 유언에 의해 고향 함경도 함흥에 묻어 드리지 못한 자식의 도리가 고향의 억새를 덮어주고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 생애 이야기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 때이다.

그는 개경이 함락되자 사병 2천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격파하는 등 다양한 공을 세워 나라의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됐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해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됐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됐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다음해에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했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했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 ‘함흥차사’ 일화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한다.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훗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해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했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도움말=구리문화원,문화재청 동구릉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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