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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독서 치밀한 연구 우리역사 다시 풀어내다

어릴때 독학… 35세에 성호이익 문하로
역사·백과전서학 분야 수많은 저술 남겨
현감땐 녹봉 줄여 굶주린 백성 2천명 구제
편지에 ‘여자도 글 공부하라’ 특이한 기록
동사강목 편찬 재현 등 유물 80

 

실학자 순암 안정복 탄신 300주년 특별전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내달 3일부터

올해는 실학자 순암 안정복(安鼎福) 탄신 300주년이다.

순암 안정복(1712년~1791년 7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경기도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작위는 광성군(廣成君)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성호학파의 주요 인물이자 성호 이익의 총애받던 수제자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스승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했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실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순암 안정복의 탄신 30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은 오는 11월 3일부터 내년 3월 17일까지 ‘순암 안정복,

우리 역사 이야기 - 동사강목’ 특별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안정복의 저서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80여점의 유물들이 전시된다.

전시를 통해 가난한 선비가 책을 모아 읽으며 가슴에 벅찬 것을 글로 풀어내 조선 최대의 역사서 ‘동사강목’이 만들어지는 여정을 재현한다.

방대한 독서와 치밀한 연구를 통해 수많은 저작을 남긴 안정복은 다른 사람의 책을 빌려 손으로 직접 베껴 독서바구니(초서롱)에 쌓아두고, 그 책들을 참고로 직접 편찬하고 지은 자료를 저서바구니(저서롱)에 보관하면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실학자의 서재를 완성했다.

전시를 비롯해 11월 2일과 3일에는 순암 안정복 탄신 3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된다.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한국프레스센터와 실학박물관 강당에서 각각 열리는 학술회의에는 안정복을 조명하는 최초로 진행되는 국제학술회의다.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열조통기’로 대표되는 역사 저술, 목민서 ‘임관정요’에 나타난 목민사상과 주요 목민책의 내용, 서학(西學) 비판 이론과 성리설의 내용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예정이다.


 

 

 


▲전시 주요 내용

-순암, 역사와 실학의 고장 광주

안정복의 고향은 광주 텃골(현재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 암기력이 뛰어났는데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아버지 안극(安極, 1696~1754)의 입지에 따라 오랜 동안 정주지가 일정하지도 않은 환경 때문에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학문을 시작했다.

경학(經學)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의약 등에 걸쳐 폭넓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 15~16세에는 매우 해박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젊은 시절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했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성호 이익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 후 평생 역사학과 백과전서학 분야에 수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가 됐다.



-간찰에 나타난 순암의 인간 형상

이번 실학박물관 기획전시회에서 집중 조명되는 그의 편지글에는 학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아들에게 준 글에서 행실과 공부를 일치하고 친구 사귀는 법까지 자상하게 가르친다.

여자도 글 공부를 하라는 편지는 당시에는 다른 선비에게는 보기 드문 부분이다.

스승인 성호와도 생전 3번 남짓의 만남이 있었고, 나머진 주로 편지를 통하여 소식과 학문을 교환하였는데, 예론(禮論)을 비롯하여 경전 및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관직생활과 목민의 실천

안정복이 제시하는 목민관이란 민심을 제대로 읽고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하고, 실정에 맞는 토지제도와 지방자치안을 실천하는데 핵심이 되는 존재였다.

1776년(65세) 목천현감에 부임한 그는 녹봉을 줄여서 고을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했는데, 2월부터 4월에 이르기까지 진휼한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안정복의 목민 사상은 ‘임관정요’에 잘 나타나 있다.



-순암의 공부법, 저술방식 : 초서롱과 저서롱

관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고향 덕곡리에 돌아와 영장산靈長山 아래 이택재(麗澤齋)에서 강학을 펼쳤다.

안정복은 평생 동안 그 많은 저술을 내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집안에 초서롱(抄書籠)와 저서롱(著書籠)을 비치해 두고, 남의 저작을 베낀 것은 초서롱에, 직접 지은 글을 저서롱에 담아 뒀다고 한다.



-‘동사강목’, 우리의 역사를 정립하다

실학자들의 역사 연구는 인식과 방법의 측면에서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 우선 그들은 역사를 경학(經學)에 종속된 것으로 보았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역사학의 독립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자국사를 중시하고 그것을 체계화했다.

특히, 자료의 수집과 사실의 고증, 특히 역사지리의 고증의 측면에서 성과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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