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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던 국모… 고향서 탄신 기린다

■ 여주군 17일 ‘명성황후 탄신 숭모제’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다.

역사적으로 왕이 죽거나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뒤에서 권력을 잡은 왕비들은 있었지만 명성황후는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고,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왕보다 더 주목을 받았고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돼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던 인물.

이렇듯 새로운 여성 권력을 만들었던 명성황후가 올해 탄생 161년주년을 맞았다.

황후의 고장 여주군은 17일 오전 10시 30분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여주군 능현리) 앞 광장 명성황후 탄생 161돌을 맞아 고종황제의 후손과 황후 후손 및 주민과 관광객이 대거 참여해 ‘명성황후 탄신 숭모제’를 개최한다.

탄생 161주년 기념 경축

비극적 생애 추모하기보다 태어난 곳서 축하행사로 전환‘왕비간택례’ 생생한 재현 눈길 전문가 고증 ‘헌작례’도 진행

생가 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

8살까지 유년 보낸 집 현존 앞쪽 논·밭 있고 개울 흘러 병풍같은 수목 사계절 생생 조선 중기 아담한 살림집 특징

여주는 명성황후가 태어나 어린 시절 8살까지 지냈던 생가가 현존하고 있어 여주군은 탄신의 의미를 되새기고 황후의 밝고 생동감 있는 모습을 살려내고자 경축행사로 ‘숭모제’를 추진했다.

여주군이 ‘숭모제’를 여는 것은 명성황후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것을 추모하기 보다는 여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탄신을 맞아 경축하고 있는 것.

‘숭모제’로 전환해 행사를 치르는 것은 올해가 두 번째로 올해에는 ‘왕비 간택례’를 추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왕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고종황제의 후손인 이석씨가 왕으로 등장해 왕후, 상궁, 사대부가 규수(처녀)등이 함께하며 ‘왕비간택례’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숭모제는 또 전문가로부터 고증을 해내고 관내 유림 및 종친회에서 집사로 참여해 ‘헌작례’를 진행한다.

이날 행사는 힘찬 취타대의 공연과 관내 공연단체의 사물 놀이와 함께 예조판서 행렬이 등장하면서 황후 탄생을 경축하고, 공식행사로 헌화와 분양, 축시 낭독이 이어진다.

또 ‘헌작례’는 집례관으로 경험이 있는 향교 유림회와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집례하고, 김춘석 여주군수가 초헌관으로, 아헌관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산북면 분회장이, 종헌관에는 여흥 민씨 종중삼방파 종중회 이사장이 맡아 진행하고 성우 박일씨가 홀기마다 설명과 해설을 들려줌으로써 행사의 전문성을 살리고 참가자들의 이해를 높이게 된다.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는 아담한 전통가옥과 함께 황후의 탄생을 알리는 ‘명성황후탄강구리’라고 적힌 탄강구리비가 위치하고 있어 이곳이 황후의 탄생지라는 점을 명확히 증명해 주고 있다.

생가의 앞쪽은 평탄하게 논과 밭으로 형성돼 있고 개울물이 흐르며, 뒤편으로는 울창한 수목으로 병풍처럼 둘러있어 사계절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늦가을을 맞아 정원에는 단풍나무와 아담한 소나무들이 계절의 정취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찾아오는 관광객의 발길로 연일 북적인다.

명성황후 생가는 1973년 7월 10일에 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됐다.

이 건축물에 대해서는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 13)에 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묘막(墓幕,무덤 가까이에 지은, 묘지기가 사는 작은 집)으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했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과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넓은 바깥마당에서 솟을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위치해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면서, 그 옆으로는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14칸짜리 민도리집(기둥이나 벽체 윗부분이 도리와 장여 사이에 소로 없이 도리와 장여만으로 된 한식 주택)이며 8칸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룬다.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구조로 안방(2칸)과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자로 배치돼 있고 날개채는 3량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꺽어져 방(1칸 반), 부엌(3칸), 광(1칸 반)으로 이뤄졌다.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한 아담한 규모이지만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여흥 민씨 일가의 딸로 여주에서 태어나 황후가 되기까지 명성황후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그런데 흔히 명성황후를 이해할 때 일제의 낭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비운의 황후’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출생과 집안배경에 대하여도 잘못된 정보가 많은데 이를 테면 ‘계모에 의해 길러졌다’, ‘몰락한 집안의 고아 소녀’ 등이 그 사례다.

하지만 사실을 살펴보면 조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열성 황후왕비세보’와 ‘선원계보기략’에서 여흥 민씨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철종 2년(1851), 9월25일(음력)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은 현재 여주읍 능현리에 해당된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두 번째 부인 한산 이씨의 1남 3녀 중 막내딸이다.

황후의 어릴 때 이름을 자영(紫英)아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정비석의 소설에 나오는 이름일 뿐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명성황후가 왕비에 간택된 배경

16세 때에 고종과 가례를 올려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가 왕비로 책봉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집안의 권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황후가 9세 되던해 세상을 떠났다.

민 황후가 왕비의 물망에 오른 것은 흥선대원군의 아내 민씨의 역할이 지대했는데, 민씨가 명성황후를 추천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민치구의 딸로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과는 상당히 먼 인척관계다.

민치록은 인현황후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 이었으며, 민치구와는 5대에서 갈라졌다.

여흥민씨 집안은 2명의 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즉 태종의 비 원경황후 민씨와 숙종의 비 인현황후 민씨가 이 집안에서 나왔다.

결국 여흥민씨는 명성황후를 포함해 3명의 왕후를 배출한 명문가로 등장했다.

가문도 좋았지만 민 황후는 이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자형제가 없었서 흥선대원군이 기다리던 최고의 자격을 갖춘 적격자였던 것.

흥선대원군은 순조 20년(1820년)에 태어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굴욕을 감수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외척에 대한 경계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순종 임금의 엄격한 어머니 명성황후

명성황후의 일상은 대궐에 들어가 생활 할 때 여느 왕비와 마찬가지로 왕실의 웃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를 비롯해 헌종비, 철종비 등 대비를 모시는 일에서부터 각종 제사의례에 참석하고 주관하는 일을 수행했다.

황후가 대궐에 들어갔어도 처음부터 고종에게 총애를 받은 것은 아니고 이미 고종에게는 사랑을 받는 후궁인 상궁 이씨가 있었다.

따라서 명성황후는 독수공방을 하며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소학’, ‘효경’, ‘여훈’ 등 많은 고서를 읽으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이러한 노력이 기반이 돼 훗날 개화기 고종이 부국강병을 모색하기 위해 개화정책을 실시하고, 당면한 국가적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황후는 뛰어난 안목과 국제정세에 민감한 여성 정치인으로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황후의 성격은 온화한 고종과는 달리 기민하고 용의주도했으며, 방문하는 서양의 여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종은 아들 순종을 예뻐해 밥을 먹을 때 반찬을 골라주고, 옷을 입을 때도 거들어주었지만 명성황후는 항상 순종에게 엄한 어머니로 잘못한 일이 있으면 꾸짖어 잘못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순종에게 항상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훈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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