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까지 한다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
기억이란 관념이 흡혈귀로 표현될 수 있을까? 인간의 목에 이빨을 박고 피를 빨아먹는 혈색 없는 얼굴, 빛나고 충혈 된 눈, 튀어나온 송곳니, 박쥐같은 형상으로 숨어 다니는 어둠의 존재. 낮에는 사람 밤에는 귀신인, 인간과 귀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존재. 절대 죽지 않는, 끊임없이 달라붙는 어릴 적 트라우마는 흡혈귀보다 더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지워지지 않는 어떤 기억은 흡혈귀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 ‘인간의 피를 먹진 않는다’지만 휘파람 같은 간단한 방법으로 불러들이면 언제든 ‘어깨에 박쥐처럼 내려앉는’ 기억. 그러고 보면 우린 늘 기억이라는 흡혈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성향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