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老松)의 말씀- 墨客에게 /한양명
나는 멈춘 듯하지만
정해진 대로 늙어가고 있다
세월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내 앞의 그대 나를 그리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영정을 그리고 있다
머잖은 날, 그대 몸은 내 껍질처럼 주름질 것이고
마음은 솔잎처럼 말라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바람은 멈추지 않고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대, 붓질 멈추고 잠시 자신을 돌아보라
가을 지나온 바람이 머리를 스치며
희끗희끗 찬 서리를 내리고 있으니
- 시집 『허공의 깊이』, 2012년, 애지
누군가로부터 내 주머니에 넣어 준 귤 두 개가 책상에 시간이 멈춘 채 며칠째 그 껍질이 쭈글쭈글 말라가고 있었다. 멈춰진 시간 속에 그대로 말라가는 귤 한 조각처럼 한 해를 보내면서 무엇엔가 분주히 살아온 사람들은 스스로 부지런했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살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내 앞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 동안 어쩌면 아름답게 늙음을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누구나 제 인생의 묵객(墨客)이리라. 그 손에 든 붓을 멈추고 돌아보면 내가 그린 내 얼굴 이외 다른 내 얼굴이 그려져 있다. 시간과 묵객이 함께 멈추어 있는 고요한 겨울밤에 가을 낙엽을 밟고 지나온 내 머리에 문득 서리가 내리고 있음을 본다. 나이 듦의 경건한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본다. /김윤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