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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한 스무살 중학교 4학년 만학도 연필을 총으로 바꿔잡고 포화속으로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나의전쟁 ② 최태운 옹
전쟁과 인간, 그리고

 

한쪽에서 진격을 시작하면 저쪽에서

박격포를 날리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있던 시체가 조각이 나면서 군복에 둘둘둘 말려들어

가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나중에 시신을 회수할 때면

군복 조각에 쌓인 걸 그대로 들고 오곤 했지요.

입영 통지서 받고 ‘석달은 살 수 있을까’ 생각

총·수류탄 사용법 간단히 교육받고 아수라장으로

인천상륙작전 투입 등 사선 넘나들며 구사일생

수류탄 파편 부상으로 명예제대후 공무원 생활

산업공로훈장도 받아… 전우들 생활고 안타까워


석달짜리 입대

1950년 대구 칠성동, 서문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는 부모 아래서 당시 20살이던 최태운(83) 옹은 대구영남중학교 4학년생의 ‘만학도’였다.

그 해 7월, 북한의 남침 소식을 전하면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져가는 마을 분위기 사이로 그에게 입영 통지서가 전해졌다.

통지서를 받아든 최 옹은 ‘석달은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덜컥 겁이 났다.

“요즘 군대는 2년이라는데 그때는 ‘석달’이라고 그랬어요. ‘석달 이면 죽을 거다’ 이거지요.”

최 옹의 부모는 ‘피난을 가나 안가나 다를 게 있겠냐’며 고향인 대구 칠성동에 남았다. 그런 가족을 생각하며 최옹은 8월 16일 대구에 마련된 제1교육대대에 입대했다.

총과 수류탄 사용법에 대한 간단한 교육만 받는 최 옹은 곧바로 17연대 1대대 3중대로 배치 받았다. 17연대는 당시 안강지구에서 한창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때문에 최 옹은 배치 즉시 전투에 투입됐다.

실전은 이제 막 연필을 총으로 바꿔 쥔 신병에게 너무나 가혹한 풍경을 펼쳐보였다.

“앞에 작은 고지를 사이에 두고 점령전을 벌였는데, 고지 주변이 시체와 부상자들로 아수라장이 돼 있었어요. 부상자들이 눈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가까이 가면 적탄이 날아오니까 데리러 가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하는 괴로운 상황이었지요.”

‘285고지’라 기억하는 곳. 부상병과 시체로 둘러쌓인 그 곳에서 명령에 따라 진격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총을 쏘다 보니 최 옹은 어느새 총을 ‘쏜다’보다 ‘갈긴다’는 표현이 입에 붙어 있었다. 그렇게 첫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인천 상륙과 서울 탈환

9월 초. 부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 떨어졌다.

“막 참전을 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명령만 따랐어요. 부산에 갔더니 배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에 가서 교육을 받는다’고 하기에 ‘그렇구나’ 했지요”

그러나 선상에서 작전 지시를 위한 집합 명령이 내려졌다. 부대원들에게는 미 군복과 신식무기가 지급됐다. 직감으로 목적지가 일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작전이 새나간다고 비밀로 한거였어요. 그때는 피난민 속에도 인민군들이 숨어있고 그랬거든, 군대서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걸 그때 알았어요.”

17연대는 당시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대한민국 육군으로는 유일하다.

며칠 전까지 포항에서 인민군과 격전을 치룬 터였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라는 명령에 ‘죽었구나’하는 생각 말고 무슨 생각이 더 나겠어요?”

인천 송도. 작전지역에 도착해 상륙용 보트로 몸을 옮겼다. 해안은 적과 아군의 포격이 한창이었다.

“포탄이 콩알을 뿌리듯 날아오는데 조명탄 빛으로 보니 바다에 배가 가득했어요. 그걸 보니 되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시에 투입되니 내가 죽을 일이 적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더라구요”

흩뿌려지듯 하는 포탄 아래로 최옹이 탄 보트는 무사히 해안에 닿았다. 해안에 닿는 보트가 늘어나자 인민군들은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아군 부대는 퇴각하는 인민군을 쫓아 서울까지 진격해 9월24일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탈환 직후인 10월2일. 17연대는 31, 32연대와 함께 이날 창설된 보병 제2사단의 전신이 됐다.



1·4후퇴와 김화지구 전투

2사단은 패주하는 인민군을 쫓아 북으로 진격 강릉 탈환작전을 시작했다. 도중 대관령에서 인민군 4개 사단과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됐지만 교전은 없었다.

재차 퇴각하는 인민군을 쫓아 강릉을 탈환한 부대는 12월 중순 김화지구에 도착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부대는 진지를 한 달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현리까지 후퇴한다.

1차 집결지에 모인 전우는 40여명. 700명이 넘던 전우들은 열에 하나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듯 했다. 그렇게 정말로 4달을 채우지 못하고 동기의 태반이 군생활을 마쳤다.

괴멸적 타격을 입은 부대는 충주로 이동해 신병을 보충하고 교육훈련을 진행했다. 부대가 작전 수행이 가능한 수준이 됐을 때는 어느덧 4월이었다.

그 사이 전선은 38도선 인근까지 회복돼 있었다. 최옹의 부대는 김화지구로 재 투입됐다.

6월 중순, 다시 찾은 김화지구. 오늘날 저격능선이라 불리는 곳에서 최옹은 전투를 준비 했다.

“거기를 지금은 ‘저격능선’이라고도 하는데 ‘피의 능선’으로 더 많이 부릅니다. 그만큼 죽은 사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름 그대로 전장은 시체로 가득했다.

“한쪽에서 진격을 시작하면 저쪽에서 박격포를 날리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있던 시체가 조각이 나면서 군복에 둘둘둘 말려들어 가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나중에 시신을 회수할 때면 군복 조각에 쌓인 걸 그대로 들고 오곤 했지요.”

6월 말. 어렵게 점령한 저격능선 진지에 휴전협정이 맺어졌다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1차 협정이었지만 포성은 잠시 멈췄다. 부대는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며 이대로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적군을 앞에 두고도 전투가 없이 한 달이 되니까 이제 정말 끝났나보구나 생각이 들어 ‘살았구나’ 했지요.”

그러나 8월 초. 휴전협정이 취소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8월 16일. 저격능선과 이어진 ‘오봉능선’에 대한 점령전이 시작됐다.

“산세가 주먹을 쥔 모양으로 다섯 봉우리가 볼록 솟아 있어서 ‘오봉능선’이라고 불렀는데, 주먹을 보면 엄지 있는 데가 제일 낮아서 그 다음 솟은 데랑 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거기가 딱 그랬어요”

첫 봉우리 점령을 위한 진격이 시작되자 다음 봉우리에서 적군의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고저차가 커 반격이 어려웠다. 그러나 다음 봉우리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고지전이란게 다 그래요. 명령이 떨어지면 다 뛰어 올라가는 거지. 반쯤 정신이 나가서 뛰다보면 총에 맞아도 아픈 줄을 몰라요. 뼈가 부러져서 어디 한군데를 못 움직이거나 해야 총에 맞은 걸 알지, 살 떨어져 나가는 건 뛰는 동안은 몰라요. 뜀박질 멈추고 숨 좀 돌리다 옆에서 ‘야 너 여기 피난다’ 하면 그때서야 아픈거지요.”

그렇게 뛰어 올라 봉우리를 막 점령한 때였다.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최 옹의 옆에 떨어졌다. 폭발한 수류탄 파편이 최 옹을 덮쳤다.



정전 후 삶

부상으로 후송된 최 옹은 1951년 11월 25일 명예제대한다. 처음 군에 입대하며 생각했던 3개월에서 1년이 더 지나있었다.

고향에 내려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전우들을 생각하다 정전을 맞이한 최 옹은 이후 명예 제대자를 대상으로한 공무원 시험을 통해 공직 생활을 하다가 아는 분 소개로 안양의 ‘금성방직주식회사’에 입사해 ‘산업역군’으로 지냈다.

1975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박 전대통령에게 산업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퇴직후에도 관련 업계의 공장 설립, 시설 도입 등에 참여하며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1996년, 전우이자 전임지회장인 박정길 옹의 부탁으로 부지회장으로 활동하다 2011년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지방의 자녀들 곁으로 물러나는 전임 회장의 뒤를 이었다.

“석달을 넘기면 오래 산다 생각했던 이들이 어느새 80이 넘은 늙은이가 됐지요. 참 많이 살았어. 그런데 우리 참전용사 회원들 보면 요샌 한달 앞을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 많아요.”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 밖 게시판에 걸린 회원들 사진을 보여주며 한사람 한사람을 추억했다.

“젊어서 전쟁으로 배울 시기를 놓쳐, 일도 못 구해 제대로 벌어둔 사람이 손에 꼽거든. 한달 회비 3천원을 못내서 사무실을 못 찾는 회원 이야길 들으면 참 세상이 야속하지”

최 옹은 고인이 된 전우들을 소개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미소로 달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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