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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한국의 영원한 벗으로 평가받는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 박사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전쟁 발발 당시 김화지역의 교암산 전투에서 자원특공대를 이끌고 적진에 진격해 공격 축선을 차단, 중대를 위기에서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낙규(安樂奎·1929~1953) 일등중사를 선정, 발표했다.

 

 

 

안낙규(安樂奎·1929.5.3~1953.7.14) 일등중사

교암산전투서 특공대 이끌고 적진 교란

적군 대공세에 중대 전멸 위기… 고지 사수 위해 특공대 편성

3발의 수류탄 휴대한 채 8명의 자원특공대 이끌고 적진 돌파

적 공격 축선 차단 등 백병전 벌이다 총탄 맞고 장렬히 산화


“비록 내일 전쟁이 끝난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전우들을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다.”

1929년 5월 3일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에서 출생한 안낙규(安樂奎) 일등중사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먼저 군대에 입대했다.

1953년 김화지역의 교암산전투에서 제6사단 19연대 1대대 2중대의 중대장은 통신두절과 아군피해가 증가되는 위험한 상황하에서 407고지가 피탈되면 인접중대 및 대대가 전멸될 것으로 판단하고 적의 후방을 기습, 공격제대를 마비시키기 위한 특공대를 편성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특공대에 자원한 안낙규 일등중사는 8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3발의 수류탄을 휴대한 채, 중대 주진지를 출발해 능선으로 접근해갔다. 피아간의 자동화기와 포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능선의 가장자리에 도착한 특공대는 적의 무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적의 최전방 추진보급소의 탄약 운반차량임을 감지한 안 중사와 대원들은 50여 m를 질주해 수류탄을 투척했고 이를 폭파했다.

추진보급소를 폭파한 대원들은 적의 공격 축선으로 파고들었다. 암흑 속에서 특공대는 수류탄을 투척하고, 총검을 휘둘렀고 적진은 혼란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계속 대원들을 독려하며 백병전을 벌이던 안낙규 일등중사는 복부와 가슴에 적이 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으며, 그 이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불행히도 안낙규 중사는 적에 의해 현장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이처럼 안낙규 중사를 비롯한 특공대원들의 목숨을 바친 활약으로 연대는 전멸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54년 6월 25일 정부는 안낙규 일등중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73호)을 수여하며 전 장병의 귀감으로 삼았다.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26~1949.8.5) 박사

육영공원 교사로 첫 내한… 한국청년 계몽활동에 전념

을미사변 계기로 헤이그특사 활동 막후 지원 등 본격 참여

세계에 한국독립 호소… 외국인 최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청년의 계몽에 기여했으며 독립신문 창간 지원 및 ‘korea review’창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도덕성, 인간 중심사상 및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 성장한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자격으로 처음 내한,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지리서를 펴내는 등 한국청년에게 세계를 알리는 계몽활동에 전념했다.

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한 집필활동에 집중해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에 관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며 구미열강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이후 헐버트 박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춘생문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세계평화회의에서 이준 등 밀사들의 활동을 막후에서 돕고, 독립신문 창간도 지원한 헐버트 박사는 YMCA를 창설하는 데도 참여했으며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근대적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광복 후 1949년 국빈자격으로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았던 헐버트 박사는 내한 후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영면했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유언에 따라 서울 마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정부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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