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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사회 독립운동 이끈 선구자

강영소(姜永韶·1886.2.18~1934.8.24) 선생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 3·1운동시 하와이 연락책 맡아
흥사단 간부·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등 활동 활발

 

 

 

강영소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고, 흥사단 간부 및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맡아 동포사회를 이끈 지도자로 부친과 5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해 일가족 4명이 건국훈장에 추서되는 등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1886년 2월 18일 평안남도 증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에와농장에서 설립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지고 있을 당시 선생은 국권회복의 후원과 교민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단체들과 합동해 한인합성협회를 결성,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09년 2월 한인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가 합동해 국민회가 결성될 때에도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했으며 1910년 2월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합동해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하자 선생은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1910년 10월 미주 본토로 이주한 선생은 신한민보사의 총무원으로 일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재무와 중앙총회의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13년 5월에는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돼 총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총회에서 직접 관할하도록 하고, 국어교육의 강화, 새 이민자의 관리, 실업부의 설치 등을 주요 사업으로 전개했다.
 

 

 


 

 

 

또한 스티븐스 포살사건으로 형이 집행 중이던 장인환의 석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하와이로 파견돼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책을 맡았고, 1923년 시카고로 간 뒤에는 임시정부재정후원회 위원, 신한민보사 시카고지국장 등으로 10여년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26일 별세했다.

정부는 지난 2011년 고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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