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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총구 앞에서도 당당했던 겁없는 청년 조국사랑 현재 진행형

몸은 북한에 마음은 남한에
강원 통천고 3학년 재학중
공산주의 교육 싫어 학교 중퇴
아버지와 농사 짓던 중 전쟁 터져

 

가방속에 들어있던 이승만 대통령 만세, 한국군 만세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키고 말았죠. 인민군은 곧바로 반동녀석들이라며 우리를 끌고 갔죠.

나의전쟁⑪유상학 옹

1950년 봄 강원도 통천군(현 함경남도). 당시 23살이던 유상학(86) 옹은 통천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농계층 집안으로 형편도 넉넉했다. 하지만 유 옹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산주의 정권·사상 등 이념교육이 본인의 생각과 맞지 않았던 것. 몸은 북한에 있지만, 마음은 남한을 향해 있었다.

■ 북 정권 사상주의 교육… 도피

“막스와 레닌, 스탈린 과목이 있었어요.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이루자는 것인데 제 생각과는 맞지 않아 힘들었죠. 그 당시만 해도 이미 공산주의 이념교육이 사회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어요.”

계속된 고민 끝에 유 옹은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시작했다. 배움은 끝이났지만, 집안일을 돕는 것에서 유 옹은 행복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처럼 논에서 농사를 짖던 유 옹은 낯선 광경을 목격했다.

“당시 논 앞으로 원산~양양 구간 북부철도선이 지났죠. 철도를 따라 인민군 모양이 새겨진 탱크와 포 등의 화력기기가 배치되는 거에요. 직감적으로 큰 일이 생기겠구나 생각했죠.”

유 옹의 직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유 옹은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 6명과 함께 한국군을 환영하기 위한 길을 나서는데 뜻을 모았다. 본격적으로 공산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유 옹과 지인들은 가방속에 국군과 UN군 및 이승만 대통령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담았다.

유 옹과 친구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강원도 철원군 등대리 소재 한 야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3개월 가량 숨어 지내며 전황(戰況)을 살폈다.

3개월이 조금 지난 어느날, 유 옹과 친구들은 이동중에 인민군과 마주쳤다. 같은 북한 사람이지만, 사상이 달랐기 때문에 적이나 다름 없었다.

“인민군이 여기서 뭐하고 있으며, 가방속에는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어요.”

유 옹과 친구들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도망쳤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인민군은 재차 가방속 물품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가방을 빼앗겼다.

“가방속에 들어있던 이승만 대통령 만세, 한국군 만세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키고 말았죠. 인민군은 곧바로 반동녀석들이라며 우리를 끌고 갔죠.”

유 옹과 친구들은 꼼짝없이 연행됐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함께 가던 친구 4명이 서로 짠듯이 동시에 아카시아 덩쿨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인민군들은 곧바로 덩쿨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유 옹과 다른 친구 한 명은 빗발치는 총성에 기가 죽어 도망치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또 다시 어디론가 연행됐다.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송림 뒷편으로 인민군들이 은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예비 소대(굴)가 나왔다.

■ 북 내무소 심문… 생사의 기로

심문이 시작됐다.

“인민군 군관(장교)이 왜 가방속에 이승만 대통령 현수막이 있냐고 물었어요. 대답이 없자 소총으로 어깨와 옆구리를 마구 내리쳤습니다.”

유 옹과 친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구타는 계속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계속된 심문에 군관도 지쳤는지 내무소(북한경찰서)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유 옹은 당당하게 말했다.

“여기서 처리해라.”

하지만 유 옹과 친구는 다시 내무소로 보내졌다. 그리고 또 다시 내무소 심문이 시작됐다.

심문보다 더 큰 고통은 결박당한 몸이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결박시켜 놨기 때문에 온 몸에 감각이 사라졌다.

순간, 유 옹은 한 내무소 경찰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괴뢰군이 오고 있으니 빨리 후퇴해야 한다고 했어요. 당시 인민군은 국군을 괴뢰군이라 불렀죠. 꼭두각시란 뜻이지요.”

국군의 진격으로 후퇴를 앞둔 내무소 경찰들은 유 옹과 친구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두 사람을 끌고 1㎞가량 떨어진 마을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길에 나서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무소 경찰은 유 옹과 친구를 총살하기 위해 양쪽에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저는 국군 입성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쉽다고 했어요.”

그말을 들은 내무소 경찰은 유 옹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잠시 후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 유 옹의 뒤에는 권총을 든 보초병이, 친구의 뒤에는 총창을 든 보초병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구령에 맞춰 집행이 시작됐다. 곧바로 친구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유 옹의 차례가 다가왔다. 유 옹의 뒤에 서있던 보초병이 권총을 장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보초병이 총살을 제지했다.

“총알이 아까우니 총살이 아닌 총창으로 죽이라고 하더군요.”

총창을 든 보초병은 유 옹의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 옹을 수차례 찔렀다.

순간, 하늘이 도왔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총창이 깊게 들어오지 못한 것.

“6군대를 찔렸는데 제대로 찔린 곳은 2곳이고 나머지 4군데는 가벼운 상처만 났죠. 그나마 2곳도 두꺼운 옷 때문에 아주 깊게 파고 들진 못했죠.”

의식이 남아있던 유 옹은 보초병이 돌아갈 때까지 가까스로 죽은 척 연기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보초병의 인기척이 없어지자 유 옹은 친구를 불렀다. 그러자 친구도 가냘픈 목소리로 유 옹을 향해 대답했다.

“친구도 저처럼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목숨을 건졌죠. 아마 보초병들도 총창은 처음이라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아찔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긴 유 옹과 친구는 다시 마을로 향했다.

■ 국군의 도움

유 옹은 상처난 몸을 이끌고 10리 가량 떨어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유 옹의 부모가 집으로 돌아왔다.

유 옹의 부모는 마을사람들로부터 아들이 인민군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만남이 이뤄졌다.

“한 동안 눈물만 흘렸죠.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 동안 부모 심정은 오죽했겠어요.”

유 옹은 집에서 쉬며 치료에 전념했다. 유 옹의 아버지는 유 옹을 소달구지에 싣고 마을 면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는 진격한 국군이 의무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군은 유 옹을 따뜻하게 맞아줬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의무대 중령이 상처난 제 모습을 보고 빨리 치료해주라고 큰 소리로 말했어요.”

3개월간 휴식을 취하자 유 옹의 몸도 어느정도 회복을 되찾았다.

하지만 전시상황은 더욱 거세져 통천군도 안전하지 않았다. 유 옹은 잠깐 고향을 떠나 있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부모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마을 사람들과 금난포구에서 배를 타고 주문진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유 옹을 맞이하고 있었던건 고난과 역경이었다. 유 옹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다. 노상에서 파는 고구마를 얻어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유 옹은 한 동안 전국을 떠돌며 경북 영양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운 좋게 마음씨 좋은 교회 집사를 만나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했다.

하지만 계속 있을 수 없어 유 옹은 자진입대를 결심했다.

■ 북을 넘나드는 HID 임무

1953년 4월. 유 옹은 육군 헌병대 문관(군사 관련 행정 사무를 보는 업무)으로 군에 입대했다.

이미 군에 갈 나이가 넘은데다 생계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유 옹은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문관 생활 과정 중 우연한 기회에 육군 첩보부대(HID)로 착출됐다. HID는 북파공작원으로 북파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다.

그곳에서 유 옹은 북한 군 관련 정보수집 임무를 맡았다. 유 옹은 과거 북한 정권에 대한 배신감으로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북 정보 수집에 총력을 다했다.

“당시 인민군 패잔병들을 교육시켜 북으로 보낸 뒤 정보를 파악하고 다시 소집시키는 임무를 맡았죠.”

유 옹이 맡은 업무는 굉장히 중요했다. 그곳에서 수집된 정보는 곧바로 육군 중앙정보국으로 전달돼 작전명령에 실시간으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유 옹은 인민군 패잔병들을 교육시켜 북한의 지형과 지물, 군 초소 현황 정보를 빼내는데 열중했다.

어느날 새벽. 유 옹은 강원도 고성 거진항에서 선박으로 인민군 패잔병들을 태우고 북으로 향했다.

“심야시간을 통해 패잔병들은 북에 내려주고 기다렸다가 다시 태워와야 했거든요.”

작전은 하루 하루 긴장의 연속이었다. 정보 수집에 나선 패잔병이 돌아오지 않으면 작전이 아무 성과없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보 수집에 나선 패잔병 보다 적지에서 적군의 눈의 피해 대기하고 있던 유 옹의 목숨이 더 위험했다. 특히 패잔병들이 서로가 짜고 유 옹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1분 1초도 방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패잔병들은 정부 수집 후 다시 선착장으로 모였어요. 돌아오지 않은 패잔병들은 도망갔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죠. 그래도 많은 인원들이 북 정권을 버리고 다시 돌아왔죠.”

유 옹은 패잔병을 통해 소집한 정보를 취합, 상부에 보고했다. 그렇게 4개월 정도 HID임무를 수행했을 무렵 휴전 소식을 접했다.

■ 제대, 그리고…

휴전 후에도 유 옹은 4년동안 군 생활을 하고 1957년 9월에 제대했다. 유 옹은 아쉬움이 컸다. 좀 더 일찍 군에 입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유 옹은 제대 후 전남 순천지방철도청에서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했다.

퇴직 후에는 6·25참전 용인시지회 유림동분회 총무 역할을 맡으며 참전용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용인지역 복지관에 다니며 무료한자교육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용인지역 복지관을 다니며 한자교육과 동시에 6·25전쟁의 의의를 좀 더 알리고 싶은 것이 유 옹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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