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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수(黃學秀·1877.7.20~1953.3.12) 선생

남한 유일 수력발전소인 칠보발전소 탈환 위해 50일간 혈전
정전 체결 이후에도 지리산 장악한 빨치산 토벌작전 총지휘

 

조국 광복 위해 평생 헌신한 참 군인

황학수 선생은 1877년 서울 화동에 부친 황두연과 모친 홍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나 1900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위로 임관돼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했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당시, 경북 일대의 의병진압 명령을 받은 선생은 안동진위대 대장직을 사퇴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병의 사살을 막고 체포 후 모두 석방조치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자, 제천으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전념했고, 육군무관학교 동기생 다수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1919년 3·1운동 발발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선생은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1919년 11월 군무부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했으며, 이듬해 12월 군사간부학교가 문을 닫자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북경 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해 군사위원으로 선임, 군사단체의 통일을 모색했다.

군사통일회의 결렬 후 선생은 서로군정서 군무부장으로 이상룡, 여준 등과 함께 군사조직재건에 주력했고 이후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해 신민부 참모부 위원으로 군구(軍區)를 확대시키는 데 크게 활약했다.

이후 김좌진과 함께 마적단 본부를 찾아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으며 또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김좌진 등과 신민부 대표로 참여했다.
 

 

 


이후 선생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길림구국군과 함께 한중연합토군을 편성해 대일항전을 전개했으나 1933년 10월 오의성부대의 기습으로 독립군 대부분이 와해되자 선생은 만주를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38년 선생은 광복군 창설을 추진, 병력을 모집하고 부대를 편제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조국 광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최전방에서 광복군을 지휘했다.

이렇듯 선생은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독립군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유일한 인물이자 일평생 군인으로 최전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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