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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흑우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흑풍회 및 흑우연맹을 조직했으며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지원, 주중일본공사의 처단을 계획했던 원심창(1906.12.1~1971.7.4)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 편대장으로 UN 공군과 협동작전이 아닌 한국 공군 단독으로 원산폭격잔전에 참가, 치열한 대공 화망을 뚫고 적진 공격을 강행해 적의 후방 보급기지를 강타하는데 큰 수훈을 세운 신철수(1926.2.24~1951.12.15)공군 소령을 선정, 발표했다.

 


日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아나키스트

 

 

원심창(1906.12.1~1971.7.4) 선생

 

일본 유학 중 아나키즘 사상 공감… 흑우회 재건 등 활동
中 천진 일본영사관 폭탄 투척·‘육삼정의거’ 주도 등 투쟁

12월의 독립운동가 원심창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선생은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선생은 1920년 서울의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무렵 중퇴 후 1923년 일본 도쿄로 유학해 니혼(日本)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

학비 조달의 어려움으로 자퇴하고 독학을 통해 일본의 사상가인 오스기 사카에 등의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한 선생은 재일한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의 박열과도 교유했으며 도쿄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과 박열의 일왕폭살기도 사건을 통해 아나키스트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 일본의 신진 유학생과 함께 흑우회를 재건하고, 1926년 흑색운동사를 설립해 기관지 《흑우》등을 간행했다.

흑색운동사를 흑색전선연맹으로 바꿔 일본의 전국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해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어 1927년 흑풍회로 개칭, 이듬해 흑우연맹으로 확대·개편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와 대립해 항일투쟁을 물론 반공산주의 활동과 선전활동, 노동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한 ‘학우회사건’으로 구속됐다가 보석 석방된 후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이듬해 5월 상하이에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총 본부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1931년 10월부터 서기부 책임으로 청년동지들의 규합은 물론 각종 정세감찰 및 보고와 항일 사상을 선전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흑색공포단의 대원으로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등 의열투쟁에도 참여했다.

1933년에는 이른바 ‘상해 육삼정의거’인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계획했다가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제와 장개석의 밀약이 세상에 폭로돼 반대세력과 민중들의 시위가 격화됐고, 일제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선생은 일본 나가사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일제의 죄악상과 야만적 행패를 꾸짖고 일체의 항소 권고를 거부했으며, 해방 후 출옥시까지 12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항일투사로서 평생을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1977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한국 공군 단독 원산폭격작전 ‘수훈’

 

신철수(1926.2.24~1951.12.15) 공군 소령

 


 

 

1950년 공군 소위 임관… 적 후방 보급기지 강타 등 큰 전공

적의 대공포에 전투기 피탄되자 적진으로 돌진 장렬히 산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이 본적인 신철수 공군 소령은 1926년 일본에서 출생, 항공기에 대한 남다른 동경심으로 산이항공기 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상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일본에 징집돼 다찌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에서 조종과정을 수료했다.

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한 신철수 소령은 1949년 항공병 제1기로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 입대해 조종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6.25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간부후보생 8기 과정에 입교해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과 동시에 공군 보급창으로 전속발영을 받았으며 1년 간의 근무를 마치고 1951년 비행단으로 전보돼 F-51 전폭기에 대한 전환교육을 받았다.

신철수 소령은 1951년 10월 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 편대장으로 UN 공군과 협동작전이 아닌 한국 공군 단독으로 원산폭격작전에 참가, 치열한 대공 화망을 뚫고 적진 공격을 감행해 적의 후방 보급기지를 강타하는데 큰 수훈을 세웠다.

이후 화천일대의 적 보급소, 포 진지, 병력 집결지를 타격해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신 소령은 1951년 12월 15일 금성지구 북방으로 출격해 적의 후방기지를 타격하는 대지 공격작전을 위해 저공으로 기관총 소사를 가하던 중 적의 대공포에 전투기가 피탄되자 양익을 두번 흔들어 비장한 최후신호를 알린 후 애기와 함께 적 진지로 돌진해 장렬히 산화했다.

신철수 대위는 총 36회의 출격을 기록하며 수많은 전공을 수립했으며 정부는 신 대위의 전공을 기려 공군 소령으로 일계급 특진을 추서했고, 1951년 화랑무공훈장, 1952년 을지무공훈장, 비행훈장, 공비토벌기장 및 6·25종군기장, 대통령 수장 등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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