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30 (화)

  • 흐림동두천 25.6℃
  • 흐림강릉 30.1℃
  • 구름많음서울 26.5℃
  • 구름많음대전 26.7℃
  • 맑음대구 26.5℃
  • 맑음울산 25.8℃
  • 구름많음광주 26.4℃
  • 맑음부산 26.7℃
  • 맑음고창 26.1℃
  • 맑음제주 27.7℃
  • 구름많음강화 24.7℃
  • 구름조금보은 26.1℃
  • 맑음금산 26.3℃
  • 맑음강진군 24.9℃
  • 맑음경주시 25.3℃
  • 맑음거제 26.0℃
기상청 제공

전쟁통에 두번 군대에… 손끝엔 아군 운명 걸려있었지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나의전쟁 김 덕 배 옹
전쟁과 인간, 그리고

1950년 봄. 당시 스무살을 갓 넘은 김덕배(85) 옹은 여주군청에 재직중인 공무원이었다. 일제시대 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김 옹은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던 재원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발발한 6·25전쟁은 김 옹의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전쟁 발발 후 김 옹은 집에 숨어서 외부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미국 수사기관(CID/첩보부대)로 부터 강제 징집을 당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방도 나라를 지킨 일등공신이지만 저 역시 뒤에서  보이지 않는 임무를 잘 소화해낸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여주군청 공무원 재직중 6·25전쟁 발발                                                                                                   이듬해 美수사기관 첩보부대 강제징집                                                                                                     고향으로 돌아오자 다시 육군 징집

3사단 중대본부 발령… 연락병 차출
중대장 지시 무전 통해 각 중대 알려
방심하면 중대 몰살… 임무 소화 자부심

 

중공군 기습에 중대원 68명 중 64명 전사
가까스로 피해 수도사단 합류 포천 파견
중공군 작전 없이 공격 오히려 상대 쉬워

장교임관 시험 합격에도 기록 없어 재응시
1953년 보병학교 입교… 1964년 대위 제대
현재 참전유공자회 여주시지회 상임부회장
독거노인 돕기활발… 내년 전적지순례 계획

 


◇ 미군 CID 소속으로 군인에 첫 발

미국 CID는 전시상황에 일어날 수 있는 강간, 도둑 등의 위험으로부터 민간인 감시 및 지역 정찰 임무를 도맡았던 첩보부대다. 하지만 CID역시 인력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당시 여주군에 살고 있던 김 옹을 포함해 마을 청년 4명을 징집 대상으로 삼았다.

“저를 포함해 마을 청년 4명이서 기본적인 보초 교육을 받은 뒤 곧바로 미군 트럭을 타고 춘천으로 향했어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춘천 802고지 밑 GP(관측소). 김 옹과 마을 청년들은 하루 아침에 춘천의 조그만 마을로 배치돼 지역 정찰 임무를 맡았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을 지켰죠. 위험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초를 서니 무료하기도 했어요.”

김 옹과 마을 청년들은 그렇게 3개월 간 미국 CID의 보초 업무를 도왔다. 그리고 3개월 후 미국 CID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서 자연스럽게 해산됐다. 김 옹과 마을 청년들은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원주를 거쳐 제천까지 내려간 뒤 다시 걸어서 여주로 향했다. 제천서 여주까지 걸어서만 꼬박 닷새가 걸렸다.



◇ 고향 오자마자 다시 징집, 논산훈련소 입소

김 옹과 마을 청년들은 그렇게 3개월 만에 고향 여주에 도착했다. 하지만 심신의 안정을 되찾기도 전에 경찰의 눈에 발각됐다.

“경찰이 그러더군요. 군대에 가야되지 않냐고. 그 길로 다시 육군으로 징집됐어요. 자원입대 하기도 전에 2번이나 징집된거죠.”

그 해 11월 김 옹은 군산 임시수용 부대를 거쳐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제가 도착할 때 논산훈련소가 막 지어졌어요. 큰 천막이 소대 지붕 역할을 대신했죠.”

시설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그릇이 부족해 제대로된 식사가 힘들었고, 화장실 깊이가 2m였지만 문이 없어 빠져 죽은 병사들도 있었다. 시래기에 된장과 소금을 탄 된장국이 주 식사였다고 김 옹은 당시를 회상했다.

훈련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교육내용과 교육일정 등 정해진 것은 없었다.

“훈련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소총 방아쇠 당기는 법과 기본 제식훈련을 제외하고는 배운게 없었어요.”

그렇게 8주가 지났고, 김 옹은 육군 3사단 중대본부로 발령났다. 당시 3사단 중대본부는 춘천에 있었다.



◇ 장교 임관 시험 합격에도 연락병 생활

3사단 중대본부로 발령받은 김 옹은 우연한 기회에 장교 임관 시험에 지원, 합격했다. 하지만 김 옹은 임관할 수 없었다.

“중대장이 글씨 잘쓰고 영어 단어 몇마디 할 줄 안다고 연락병으로 차출했어요. 당시 연락병은 개인 비서나 마찬가지 입니다.”

연락병의 주 임무는 중대장이 내린 공격 및 방어선 구축 지시 등을 무전을 통해 각 중대에 알리는 것이었다. 김 옹이 전달을 잘못하면 1개 중대가 몰살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낮과 밤이 뒤바뀌었고, 무엇보다 전방에서 보고된 무전을 중대장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한 뒤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김 옹의 심신은 점점 지쳐갔다.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방도 나라를 지킨 일등공신이지만, 저 역시 뒤에서 보이지 않는 임무를 잘 소화해낸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던 어느날, 중공군의 기습 포위 공격으로 3사단 본부 중대원 68명 가운데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 옹은 다행이 목숨을 건졌다. 중공군이 여러명이 있는 곳을 향해서만 집중 사격을 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무리를 져서 도망치는데 저는 중대장이 맡긴 짐보따리가 있어 혼자서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어요. 혼자 가는 제 모습이 중공군 눈에는 띄지 않았나 봅니다.”

목숨을 건진 김 옹은 남으로 향했다.

 



◇ 남(南)으로 남(南)으로… 중공군과 접전

1952년 1월. 김 옹은 남쪽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강원도 인제군 소재 복강을 건널 무렵, 아군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이는 비슷해 보였고, 고향은 같은 여주지역이었어요. 얼마나 반가웠는지요. 얘기를 나누고 같이 이동하려고 했는데 같이가면 위험하다고 흩어지자고 하더군요.”

혼자가 된 김 옹은 다시 남으로 향했다. 며칠간 먹은 음식은 건빵 몇 조각이 전부였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체력이 소진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했고, 작은 촛불로 불을 밝힌 주막집이 김 옹의 눈에 들어왔다. 김 옹은 주인에게 식사를 요청했다.

“저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이더군요. 보리밥에 고추장을 내줬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잠시 더 머물고 싶지막 주막 아낙네의 성화에 자리를 떴다.

그렇게 기운을 차린 김 옹은 다시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후 포천 이동에 도착, 그곳에서 수도사단 병력을 만났다.

김 옹은 곧바로 수도사단 예비소대 병력으로 배치, 포천 이동과 일동 지역으로 파견됐다. 당시 포천 지역은 중공군들의 침입이 거센 지역이었다.

인민군 보다 힘든 상대가 중공군이었다. 수(數)적 우위를 내세워 공격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중공군들이 수(數)적으로는 훨씬 앞섰죠. 하지만 중공군은 작전이 없었어요. 그냥 본인들 하고 싶은 대로 막무가내로 공격해와 오히려 대치상황에서는 상대하기가 쉬웠어요.”

수도사단 예비소대로 포천지구에 참전한 김 옹은 전투와 동시에 장교 임관도 준비했다. 그러나 지난해 3사단 복무 시절 시험만 합격하고 임관을 하지 못해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기존에 응시한 시험 기록이 없어 시험에 다시 응시했죠. 제 기록을 다시 찾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 소위 임관… 제대

김 옹은 1953년 3월 광주 육군 보병학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6개월 훈련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 그 해 9월 졸업과 동시에 전방으로 발령났다.

“휴전은 됐어도 전방은 작은 교전 등 전시상황 분위기가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임관과 동시에 전방에 잠시 동안 주둔했었죠.”

이후 김 옹은 제주도 육군 제2훈련소에서 교관 생활을 한 뒤 1964년 11월 육군 정보학교에서 대위로 제대했다.

현재는 6·25참전유공자회 여주시지회 상임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지회장을 도와 회원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는 것이 김 옹의 임무.

김 옹은 내년도에 시행할 전적지순례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동시에 지회 회원들과 후원회를 만들어 성금이 모이는 대로 지역 내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쌀과 라면을 기부하고 있다.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독거노인들을 위한 작은 일이라고 도맡아 하고 싶은 것이 김 옹과 여주시지회 회원들의 작은 바람이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