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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징집 가족과 생이별… 군번 받고 다시 전장으로

정전 61주년 특별기획
전쟁과 인간, 그리고
나의전쟁 18.탁 두 훈 옹

 

기세 몰아 北 진격 패잔병 격퇴
고성지역서 적군 총공격에 후퇴
1951년 10월 원주서 학도병 해산
보병학교 지원 군번 받고 졸업

헌병학교 차출 훈련소만 3번째
고된 훈련 후 부산 발령 휴전 맞아

現 수원 영통 시니어 봉사대 대표
이웃돕기·노인 일자리 육성 노력
중학교 재학시절 인민군 남침
가족과 강릉 떠나 대구로 피난

부모님 식량 구하러 나온길
헌병대에 끌려가 학도병 징집

수백명 학도병들과 기본 훈련
국군 전세 위태 포항전투 차출

인민군과 격전 속 친구도 잃어
육군 백골부대 합류로 승전보


1950년 봄 강릉시 옥천동. 당시 열여섯 살이던 탁두훈(80) 옹은 중학교에 재학중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의 탁 옹은 열심히 공부하며 하루하루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탁 옹의 원래 고향은 속초(당시 속초는 북한의 영토임)였다. 하지만 탁 옹과 그의 가족들은 공산주의 정권과 사상이 맞지 않아 한해 전에 강릉으로 남하했다. 남쪽에서의 생활에 정착할 때 즈음 6·25가 발발, 탁 옹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 학도병으로 강제징집

1950년 가을. 인민군의 남침이 거세지자 탁 옹과 그의 가족들은 강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곧바로 기차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탁 옹과 가족들이 도착한 곳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그곳에 모인 피난민들은 냇가를 따라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냇가 전체가 천막으로 덮혀 있었어요. 당장 급한 건 식량이었죠.”

탁 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다. 시내를 돌며 며칠간 보급식량을 받아다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다. 그러던 어느날. 헌병의 눈에 발각됐다.

“헌병이 나타나서는 갑자기 끌고갔죠.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어요. 어린 나이였기에 때문에 전쟁에 참전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죠. 아마 교복을 입고 있어서 헌병 눈에 쉽게 띄인 것 같습니다.”

그 길로 학도병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 아침에 부모님과 생이별을 한 탁 옹은 학도병 훈련소 집결지인 대구 소재 남산 국민학교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탁 옹 또래의 청년들로 가득했다.

곧바로 학도병 기초 훈련이 시작됐다.

신병교육은 기초적인 제식훈련과 정신교육, 간단한 소총 분해·조립 등의 과정으로 진행됐다. 연필을 잡아야 할 손에 목검으로 된 총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신병 교육은 또 다른 세계였다. 교실마다 수십~수백명의 학도병으로 가득찼다. 불편한 잠자리는 물론 식사 제공도 불규칙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도 무엇인지 모르는 학도병들은 그렇게 낯선 세계와 첫 대면을 했다.

보급된 군복도 형편없었다.

“보급받은 군복이 너무 길어서 질질 끌렸어요. 운동화는 지금의 운동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맨발이나 마찬가지였죠.”

◇ 포항전투

일주일간 기본 훈련을 받은 탁 옹과 학도병들은 M1소총을 지급받고 경북 영주를 거쳐 포항전투로 차출됐다.

포항전투는 동해안지구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3사단이 영덕과 강구지역에서 인민군 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동지역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북쪽의 흥해로 침투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국군 3사단의 퇴로가 차단되고 북한 12사단의 공격이 계속돼 포항이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어린 학도병들은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매 순간 긴장태세로 임했다. 심신은 빠르게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날, 집결 명령이 떨어졌다. 학도병들은 능선을 따라 호(壕)를 파고 적진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곧바로 사격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사격 경험이 없는 학도병들은 큰 총탄소리에 몸을 바싹 엎드렸다.

“인민군들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사격중지’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사격을 개시했어요.”

격전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탁 옹은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 학도병의 모습을 목격했다.

“정신없이 총을 쏘다 보니 옆에 전우가 죽은지도 몰랐어요. 서로 많이 의지하던 친구였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인민군을 당해내기에 학도병들은 너무 어리고 나약했다. 사상자도 많이 발생해 전세가 위태로웠다.

며칠이 지났을까. 육군 백골부대가 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작전이 개시됐다. 군인들은 마을 곳곳에 숨어있던 인민군을 색출, 포항에 있던 인민군들을 모두 사살했다.

“포항시내는 낮과 밤에 따라 주인이 달라졌어요. 낮에는 포항 시내 전체를 국군이 점령했고, 밤이면 인민군 24사단 소속들이 점령했죠. 인민군들은 매복에 능해 야간 공격에 강한 모습을 보였어요.”

 


◇ 북(北)으로 북(北)으로…

백골부대의 도움으로 포항에서 승전보를 올린 탁 옹과 학도병들은 그 기세를 몰아 강릉으로 진격했다. 국군과 미군의 군용트럭이 첨병 역할을 대신했다.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향했죠. 인민군 패잔병들은 우리를 피해 산으로 도망치곤 했어요. 몇몇 인민군들은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을 죽이곤 했죠.”

그렇게 며칠을 걸었을까. 탁 옹과 학도병들은 북한 원산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패잔병들과 맞서 싸웠다. 동시에 학도병 고유 임무임 국군 방어 임무도 도맡았다.

하루는 고성지역으로 차출됐다. 학도병들은 이곳에서 총공세를 퍼부었다. 전술적으로 육박전은 불리했기 때문에 소총 공격만이 최선의 공격이자 방어였다.

“고성지역에 난강(江)이라고 있어요. 그 강은 수심이 깊지 않은데 인민군들 시체로 강물이 넘쳐날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죠.”

며칠을 지났을까. 인민군이 중공군과 합세해 수(數)적 우위를 내세워 총공격을 시작했다.

국군과 학도병들은 서둘러 후퇴했다.

◇ 포항으로 후퇴… 소위 임관

1951년 10월. 탁 옹과 학도병들은 원산에서 배를 타고 다시 포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은 뒤 원주로 이동했다. 곧바로 학도병 해산식이 진행됐다.

“학도병들을 모아 놓더니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보병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남으라고 하더군요.”

탁 옹은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보병으로 남아 싸우기를 결정했다.

“200여명 정도가 남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다들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군번은 받고 제대하자는 생각이 컸던거죠.”

군대에 지원한 200여명은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 보병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신병교육을 받았다. 제식 훈련부터 시작해 사격, 유격 훈련이 진행됐다. 보급은 여전히 원활하지 않아 하루를 굶는 일은 다반사였다.

6개월 후. 탁 옹은 소위 계급장과 군번을 부여받고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탁 옹은 전방으로 차출되지 않았다.

“모두 전방으로 발령났는데 저를 포함해 30여명 정도는 호명하지 않는 거에요. 한편으로는 좋았죠.”

당시 전방으로 발령난 소위는 하루를 버티기 힘들어 ‘하루살이 소위’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남은 30여명의 소위들은 헌병으로 차출됐다. 그리고 경북 영주 헌병학교로 향했다.

그곳에서 탁 옹과 동료들은 또 다시 헌병 기초훈련을 받았다.

“훈련소만 3번째 입소였죠. 훈련시에는 훈련복을 입었는데 훈련복에는 계급장이 없어죠. 사병이 장교에게 욕을 해도 어쩔 수 없었어요.”

훈련소 소대 입구에 걸려있던 야구방망이에는 ‘어머니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고 탁 옹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 야구방망이로 셀 수 없이 많이 맞았어요. 교관들은 어머니가 때리는 거니까 너무 서러워 말라고 하더군요.”

3개월간의 고된 헌병 훈련을 마친 탁 옹은 부산으로 발령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휴전을 맞았다.

◇ 현재

탁 옹은 지난 2004년부터 수원시 영통 시니어복지 자원봉사대·인력사업단 대표를 맡고 있다. 자원봉사를 통한 노인들의 일자리 사업 육성이 설립 목표라고 탁 옹은 말했다.

최근에는 김장 4천포기를 담가 수원시 각 구청과 장애인 사업장에 전달했다.

자원봉사대 회원들과 오랫동안 봉사를 하며 지역 사회 어려운 곳에 힘이 돼주자는 것이 탁 옹과 시니어복지 자원봉사대 회원들의 작은 소망이다.

/권혁민기자 joyful-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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