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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 후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

영양 청량산서 유생들과 거병
타 지역 의병부대와 연합작전
절명시 남기고 동해바다 순국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도현(1852.7.14~1914.12.23) 선생


지난 1852년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 김도현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유림들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나섰다.

김 선생은 영양읍에서 통문을 돌리고 영양지역 유생들과 의병 일으킬 일을 논의했으며, 이듬해 2월 청량산에서 의병진용을 편성해 무기를 조달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부대의 통합을 시도해 자신의 부대를 예안의 의병부대인 선성의진에 합류시켜 중군장을 맡게 됐고, 경북지역 7개 의병부대의 대표들과 함께 회맹의식을 갖고 승리를 기원했다.

1896년 3월 연합의진은 상주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고, 6월에는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진과 연합해 강릉 대공산성, 보현산성 및 삼척전투에서 관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이후 선생은 선유어사의 권유를 받고 1896년 10월 15일 전기의병에서 마지막으로 의병부대를 해산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여러 나라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布告西洋各國文)’을 보내 일제의 전횡을 막는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상소투쟁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06년 1월 선생은 다시 한 번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포군 5~60명을 축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고 삼남지역의 각 군에 「의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등을 보내어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스승 이만도가 자정(自靖) 순국하자 선생은 최후의 방법으로 도해순국(蹈海殉國)을 결심했다.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與國內同胞)’과 절명시를 남기고, ‘치명수지(致命遂志)’의 길을 선택해 경북 영덕의 동해바다에서 투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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