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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민 위한 끝없는 도전… 최상의 품질·신뢰로 중견기업 우뚝

신공장 열고 해외시장 확대 박차… 노 춘 자 해송수산영어조합법인 대표

 

주민들 캔 바지락 헐값 팔려
연민으로 바지락과 인연 시작

스무살에 18톤 배 구입
궂은 날도 목숨 담보 출항
현금으로 높은 가격에 수매
1975년 대부도 굴밭 조성
어민 소득원 다양화·신뢰 얻어

시화방조제 축조 생태계 변화
52억원 들여 종패·모래 뿌려
망가진 대부도 갯벌 살려내

품질 향상 쉼 없는 노력
신지식인 선정·G마크 획득

이마트 독점 납품·日수출 등
연간 매출 150억 기업 성장

작년말 첨단설비 신공장 준공
미국·스페인 등 공략 본격화

“패류만 고집한 전문 업체
최고의 상품·정직한 가격
어민 소득증대 앞장 선다”
10년전 소비자 약속 지켜내


“해송은 35년간 일관되게 패류(貝類)만을 고집한 수산물 전문업체입니다. 저희 해송수산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원자재의 신선도, 가공시설의 자동화, 그리고 청결과 위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최고의 상품을 정직한 가격으로 판매해 소비자에게 신뢰받는 기업으로 다가갈 것이며, 어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앞장서는 기업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2004년 1월 노춘자(67) 해송수산영어조합법인 대표는 소비자들과 약속을 했다.

그리고 2년 후, 수산분야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해양수산부장관으로부터 인증서를 받는다.

당시 평택지방해양청은 수산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 창의적 사고로 일하는 방식 등을 혁신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그 과정을 사회적으로 공유한 업적이 있어 노 대표를 신지식인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노 대표의 바지락 품질 향상을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기존 바지락 포장 방식이 물포장에 제한된 데 반해 노 대표는 진공포장과 자숙(가열·삶음), 냉동 처리하는 등 포장의 다양화를 꾀했다. 이러한 노 대표의 바지락을 향한 열정은 바지락 자체의 진한 맛과 향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경기도의 G마크를 획득했고, 2005년부터는 이마트로부터 전국 점포에 바지락 독점 납품을 제안 받았다. 여기에 일본 수출까지 더해 지금은 연간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0년 전 소비자와의 약속을 지킨 노 대표는 지난해 말 국·도·시비 22억원을 지원 받고 여기에 자기자본 28억원을 보태 신공장을 준공했다.

자동세척기와 선별기, 포장기, 금속탐지기 등의 첨단 설비와 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시설을 갖추고 미국과 스페인 등 해외시장 판로 확장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해서다.

노 대표와 바지락과의 인연은 어민들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됐다.

노 대표가 태어난 대부도는 시화방조제로 바닷물이 막히기 전까지는 전국 바지락 생산량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황금어장이었다.

18살 어린 소녀의 눈에는 동네 어민들이 고생하며 캔 바지락을 제값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당시에 어민들은 바지락을 깡통에 담아 여객선에 실어 연안부두의 상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때문에 어민들은 바지락이 얼마에 팔리는지도 몰랐고, 대금도 늘 후불로 주기 일쑤였다. 어민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가슴은 아리기만 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그녀는 20살 때 1할 이자로 5만원을 빌려 18잨짜리 배를 샀다. 주위에서는 ‘무모하다’며 만류했지만 조금이라도 많은 바지락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아 어민들을 돕겠다는 어린 소녀의 의지는 단호했다.

바지락 수매 가격은 높게 책정했고, 대금은 현금으로 지급했다. 어민들의 수입은 늘었지만 그녀는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도는 사리 때만 바지락을 캘 수 있었다. 하지만 사리 때는 다른 지역의 바지락 생산량도 늘어 판매가격이 낮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이라도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거센 파도로 다른 배들이 출항을 하지 못할 때도 목숨을 담보하며 배를 띄웠다.

노 대표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녀의 나이가 20대 중반으로 접어든 1975년, 어민들이 좀 더 다양하게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노 대표는 대부도 갯벌을 굴밭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돌이 없어 굴이 서식할 수 없는 대부도 갯벌에 돌을 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빚을 내 폭약을 사서 근처 돌산에서 바위를 깨고 지게로 지어 갯벌에 돌을 심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 대표의 도전과 노력에 어민들은 신뢰로 답하기 시작했다.
 

 

 


바지락을 캔 어민들은 노 대표를 찾아와 팔아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대부도 어민뿐만 아니라 인근 영흥도·선제도 어민들까지 그녀를 찾아왔고, 이때의 인연은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서서히 대부도 바지락이 입소문을 타면서 노 대표의 사업이 번성하기 시작할 무렵, 시화방조제 축조로 대부도 주변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바지락을 확보하지 못해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한때 어민 한 사람당 바지락 채취량을 80㎏으로 제한할 정도였지만 시화방조제가 축조되면서 30㎏을 채취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물량이 줄어든 것. 그녀는 수매지역을 부안과 신안 등지까지 넓혔다.

동시에 시화방조제 축조로 망가진 어장을 살리기 위해 2000년부터 2년간 연평도에서 50억원 어치의 종패를 사들여 갯벌에 뿌렸다. 또 2억원 어치의 모래를 선감도 갯벌에 뿌려 갯벌을 살려냈다. 그녀에게 신뢰를 보여준 어민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노 대표는 “힘든 시련을 극복하고 이 정도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살핌”이라며, “아무리 힘든 일도 긍정적으로 슬기롭게 견뎌내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안산=김준호기자 j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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