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따라다니지만 지금은 머리가 희끗한 새내기 변호사일 뿐이죠.”
지난 1월 20일 43기 사법연수생 수료식에서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수료생 대표로서 ‘겸허하고 성실한 법조인’이 되겠다고 선서를 한 뒤 처음으로 변호로사로서 법정에 선 오세범(59) 변호사는 겸손한 새내기 변호사였다.
과거 김칠준 변호사 사무실에서 노동전담 사무장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니 낯설지는 않지만 이제 변호사로서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오 변호사.
지난 1997년 첫 번째 사법시험 도전을 시작으로 1차에만 8번의 도전, 2차에도 8번 만에 합격한 15전 16기의 주인공인 오 변호사는 “가장 어려울 때 찾는 변호사. 저를 찾아준 사람에게 힘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오 변호사의 꿈은 법조인이 아니었다.
지난 197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한 그는 선생님이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학자의 길을 걷길 바랐지만 입학 한 달 만에 터진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시절 ‘민주주의’를 외치다 잡혀가는 선배들을 보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는 4학년이던 지난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했으며 1979년엔 명동 YWCA 결혼식 집회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언어학자를 꿈꾸던 청년 오세범은 이 후 입학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대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출소한 뒤 취업할 곳을 찾지 못한 오 변호사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바로 기술학원에 등록했고 고압가스 냉동과 보일러 관리 자격증을 땄다.
지난 1984년 보일러공으로 화성시 소재 한 제약회사에 입사한 오 변호사는 민주화 항쟁 이후 노조 결성 붐이 일던 지난 1987년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학교에 이어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부당한 해고에 맞서 오 변호사는 직접 해고 무효 소송을 진행하는 2년간 노동법 지식을 쌓아갔다.
결국에는 패소했지만 오 변호사는 그 과정에서 김칠준 변호사를 만났으며 김 변호사의 소개로 법무법인 다산의 노동법 전담 사무장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소송을 준비하며 만난 석탑노동연구원의 장명국 대표와의 인연으로 지난 1993년 내일신문 설립에 참여, 업무기획실장으로 4년간 일하는 등 언론에도 몸을 담았다.
그러던 오 변호사는 지난 1997년 1월 42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연속으로 2년간 1차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1년만 더해 보고 안 되면 관두려 했는데 2000년에 덜컥 합격해 버린 거에요. 차라리 떨어졌으면 그때 포기했을 텐데…. 하·하·하.”
당시를 회생하며 웃던 오 변호사는 다시금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돌아왔다.
“그 당시 아내가 학습지 교사 등 가장과 주부 노릇을 같이하면서 고생이 많았다”며 “의사(28)와 육군 소위(27)로 근무하는 두 딸들도 제겐 큰 원동력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또한 “아빠가 평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들어오는 모습에 딸들도 아빠를 따라 공부한 거 같다”며 “그래도 일요일만큼은 꼭 딸들과 같이 보냈다”고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제 변호사로서 첫 발을 내디딘 오 변호사는 ‘사람을 존중하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만의 장점이다”며 “사건을 맡기러 온 의뢰인과 수임하는 변호사가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동반자로서 함께 옆에 있어주고 싶다”는 포부를 말했다.
또 “삶이 다하는 한 의뢰인을 만날 것”이라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이해해 나가는 것 자체가 인생의 기쁨이며 보람이다”고 덧붙였다.
주변에서는 불혹의 나이가 넘어 사법시험에 도전한 그의 용기와 정년을 앞둔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인내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런 관심에 오 변호사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설명했다.
오 변호사는 “요새는 3·40대가 살아가기 힘들다. 또 누구나 그 나이에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며 단호했다.
그는 이어 “그럼에도 그 동안의 인생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면 방향을 바꾸는 과정도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뭔가를 해낼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려는 것에 대한 준비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의 법률시장이 과거처럼 순탄한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찾아다니는 변호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변호사는 “앞으로 장애인과 철거민, 여성차별, 가정폭력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소송과 가사사건 등을 맡고 싶다”며 자신만의 길을 설명했다.
그는 또 “(가사사건의 경우) 소송만이 아니라 조정을 맡이 권유할 생각이다”며 “조정과 화해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 모습을 많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힘들어하고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변호사, 아닌 사람이 되고 싶다”며 자신의 SNS 첫 화면에 새긴 문구를 보여줬다.
‘내가 이 세상의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도록 도울 수 있기를…’
글=양규원기자 yk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