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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같은 6시간 기차여행의 종착지는 ‘구름같은 영혼’ 헤세의 평온한 정착지

 

이한숙 작가의 감성여행기 스위스 루가노 - 헤르만 헤세로 가는 길 앚

 

기차를 타고 오늘은 루가노로 간다. 티치노의 호반도시 루가노, 이번에 그곳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 몬테뇰라에 헤르만헤세가 남겨놓은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를 추억하기 위해서다. 걸리는 시간은 총 6시간 남짓, 기차를 네 번이나 갈아타야한다. 이 복잡한 여정을 굳이 택한 이유는 이태리의 도모도쏠라(Domodossola)와 스위스의 로카르노를 잇는 페로비아 파노라미카(Ferrovia Panoramica)를 타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이 기차를 택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어느 책자에서 본 내용만 가지고 복불복의 심정으로 택한 것인데 그 이상의 탁월한 선택은 없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기차는 두 시간 동안 천천히 달리며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천에 발갛게 단풍이 든 알프스 산들을 기차가 깊숙이 헤집고 달리는 동안 확 트인 창에 턱을 괴고 나는 시종 풍경에 빠져들었다. 한 풍경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풍경이 들어서고 그 풍경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풍경이 달려왔다. 이따금씩 창에 내 모습도 어렸다 사라지곤 했다.

루가노로 가는 알프스 광경, 꿈꾸듯 펼쳐져
버스, 몬테뇰라 골목사이로 누비며 아슬아슬

헤르만 헤세, 글쓰기·그림 등 작업 했던 곳
박물관엔 직접 헤세 음성 녹음해 청취 가능
카페에선 낭독회 등 행사… 사랑방 역할도


풍경처럼 내 삶의 장면들도 하나씩 다가왔다 사라졌다. 어느날 더 이상 새 삶에 다가오는 풍경이 없이 시간이 멈출 때,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테지.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한 편의 긴 파노라마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로카르노에 내려서 다시 두 번 더 기차를 갈아타고 루가노에 도착한 건 오후 3시였다.

루가노 역 라커에 캐리어를 보관하고 서둘러 역사 뒤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역사 뒤가 아니라 역 앞 언덕 저 아래로 통하는 계단을 쏜살같이 밟고 내려가 호숫가를 먼저 산책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를 먼저 해결하지 않는 이상, 모든 건 사치일 따름이다. 돌아와서 밤 산책을 하면 된다.

약간 헤맨 뒤에 436번 버스를 잘 잡아 탔다. 루가노 시내를 벗어난 차는 몇 개의 마을을 거쳐 바로 몬테뇰라에 도착했다. 마지막 정류장 바로 전, 버스는 자전거나 지나칠 법한 아주 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하게 관통했다. 마치 내 몸이 건물 벽에 부딪치는 것처럼 오싹했다. 그러나 정말 와 보고 싶은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치러야할 작은 진통, 혹은 통과의례처럼 여겨져 내 얼굴엔 오히려 미소가 번졌다.

버스에서 내리니 그곳은 동네 광장이었다. 몬테뇰라가 속한 콜리나 도로(Collina d’Oro)의 주민센터와 도서관이 먼저 눈에 띄었다. 도서관 앞 한 켠으로 ‘헤르만 헤세의 길’ 상세 안내도가 보였다. 안내도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작은 불꽃이 올라왔다.

아, 드디어 내가 이곳에 왔다!

나는 왜 이곳에 오고 싶었나. 그가 유명 문인이어서? 아니다. 몬테뇰라의 땅을 밟는 순간 나는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흐린 하늘에는 구름을 볼 수 없었다. 헤세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상징은 구름이다. 언제부터인가 구름은 현재의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지향하는 것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나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갭을 메워주는 상징물이었다.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어떤 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코 한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는 구름, 바람과 함께 멈추지 않고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 자유롭게 흘러가는 구름, 동시에 영원히 안착할 고향을 깊이 그리워하는 구름, 그 구름이 나였다.
 

 

 

 


헤세 역시 구름에게 자신을 깊이 대입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읽고 헤세에 대해 막연한 유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내 삶에 깊이 들어온 건 우연하게 그의 책 ‘정원 일의 즐거움’을 읽고 나서다. 그 이전에 읽은 헤세 책이라면, 누구나 젊은 날에 일종의 치기로 한 번쯤 잡아본 ‘데미안’이 유일했다.

‘정원 일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나는 이 사랑스럽고 고독하고 순수한 영혼에게 마구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노벨문학상을 탄 유명한 작가로서가 아니라, 깊이 상처받고 스스로를 치유해온 한 인간(wounded healer)으로서 나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글은 단순하지만 심오했고, 햇살처럼 투명하지만 내 안 깊은 곳을 찔렀다. 깊은 고뇌를 통해 터득한 그의 지혜들은 미처 내 안에서 나오지 못한 어떤 것들을 촉발하고 꺼내줬다. 헤세는 그때부터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됐다.

“전쟁이 나고 망명의 시간을 지내며 가족과도 헤어지고 깊은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나의 삶과 야망, 나의 지식과 나의 자아가 천천히 송두리째 순수한 재로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훗날, 그 자아나 욕망, 허영과 인생의 온갖 혼탁한 마력이 또 다시 옭아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하나의 은신처를 이제 찾았다. 고향을 만들고 소유하는 일이 나한테는 평생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 고향을 찾았다.”

방랑과 뿌리내림,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고향에 대한 향수 사이에서 늘 정처없이 떠돌던 구름같은 헤세 영혼이 몬테뇰라에 닻을 내리게 된 것이다.

헤세에게 몬테뇰라는 혼란스럽고 고통에 찬 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평화를 지키고 가꾸는 특별한 곳이 됐다. 몸은 정착했지만 헤세는 그곳에서 더 높이 날아올랐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꽃과 나무를 기르며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자신만의 넓고 무궁한 정신세계를 가꿔나갔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고, 자신의 소망에 따라 죽은 후에도 영원히 안식할 고향이 된 루가노의 작은 마을 몬테뇰라, 존경하는 한 인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땅을 내 발로 직접 밟아보고 싶었던 소원이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이윽해서 11번까지 이어지는 헤세의 길(Via Hermann Hesse)을 제대로 걸어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서둘러 그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박물관에서 여정을 끝내고 대신 루가노로 돌아가지 않고 이 동네 호텔을 정해 묵기로 했다. 내일 아침부터 느긋하게 헤세의 자취를 음미하기로 했다.

박물관에는 그동안 책에서 기록으로만 대했던 헤세의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수채화 그림들, 드로잉과 편지들, 엽서들, 수기 원고들, 그가 밤낯 붙잡고 있던 스미스 타자기와 화구들, 산책하거나 정원을 가꿀 때 입었던 옷들, 우산과 장화, 가족과의 사진, 그의 동상, 그리고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그의 책들, 그 외에도 많은 물건들이 고요히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어느 한 방에서 나는 그가 직접 낭독하는 그의 책의 어느 부분을 낯선 독일어로 들었다. 의미는 몰라도 그의 음색으로 듣는 그의 글의 질감이 좋아서 이어폰을 낀 채 마냥 앉아 있었다. 문닫을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그곳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우는 햇빛 속에 깃든 정적과 고요, 그러나 헤세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공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불러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또 있을까.

그의 엽서와 포스터를 사서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사방에 어둠에 깔리고 있었다. 천천히 보카도로(Boccadoro)로 걸어갔다. 보카도로는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카페다. 왼쪽 언덕길을 몇 걸음 내려가면 있다. 정기적인 헤세 문학 낭독회나 문학행사, 혹은 미술전시가 열리는 이 동네 문화 사랑방이다. 물론 간단한 식음료를 팔기도 한다. 친구와 나는 커피와 맥주를 시켜놓고 그곳에서도 헤세를 호흡한다.

휴대전화를 열어 호텔을 예약했다. 3대에 걸쳐 운영한다는 가족호텔 ‘그로토 플로나’를 운좋게 찾아냈다. 나와서 보니 동네가 너무 적막하다. 택시도 눈에 띄지 않고, 걷기에는 좀 멀고 게다가 어둡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는 우리 앞에 지붕이 열린 벤츠가 선다. 길을 물어보자, 자기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며 올라타란다. (다음편에 계속)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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