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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양식 시작된 프랑스 종묘 왕가의 흥망성쇠 처연히 간직

 

 

테마여행가 안완기가 들려주는 프랑스

생 드니 성당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목이 잘린 프랑스의 초대 주교인 생 드니 신부가 자신의 목을 들고 8㎞ 북쪽에 위치한 이곳까지 걸어와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진다. 중세 성지순례지로 각광을 받았으며 요즘도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생 드니 성당’에는 프랑스 왕족의 납골당으로 이용되는 지하공간에서 왕족의 무덤과 앙리 4세, 루이13세, 루이 17세의 심장을 구경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아버지 루이 16세와 어머니 마리 앙투와네트를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고, 철통같은 감옥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재교육 프로그램을 따르다가 사람들에게 잊혀져서 쓸쓸히 이생을 하직하고, 장기와 몸을 분리하는 전통에 의해 루이 17세(당시 10세)의 심장만 주치의가 보관하다가 몇 년 전에 조상들의 묘소로 옮겨와서 전시되고 있다. 특히 생 드니 성당은 생 드니 신부님이 숨을 거둔 곳이자, 프랑스의 왕과 왕비들이 안장됐으며 최초의 고딕양식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프랑스인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꼽힌다.

프랑스 초대 주교 참수 당해
관광객에게 성지순례지 각광

쉬제흐 주교, 수도원 증축
고딕스타일의 건축 탄생

프랑스 대혁명 이후 수탈
수차례 복원했어도 미완성


 

성당의 역사

520년에 쓰여진 즈느비에브 성녀의 삶 이야기에서, 프랑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3세기경, 카톨릭을 박해하던 로마병사들에게 체포돼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참수당한 파리의 초대 주교 생 드니의 무덤 위치가 최초로 알려진다.

4세기경 성지화된 이후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으며 5~6세기에 최초로 성당을 건립, 7세기에 다고베흐 왕의 매장지로 선정되면서 프랑스 최초의 메로뱅 왕조가 이곳을 성지화했으며 바띨드 왕비가 성당에 부속된 수도원을 세운다.

741년 까롤링 왕조의 시조인 샤흘르 마흐텔 왕이 이곳에 매장되면서 까롤링 왕조 시대에도 왕족의 매장지로 이용됐고, 유럽 최초의 대제 샤흘르마뉴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로 775년 건물이 완성된다.

하나의 중앙본당과 측랑을 갖춘 모습으로 완성된 교회는 왕족의 유해가 보존된 지하 납골당 때문에 성소부분이 본당보다 한단 높은 바닥을 갖고 있다.



고딕건축의 탄생

수도원은 쉬제흐 주교에 의해 증축되는데, 가운데 문 위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된 둥그런 장미창을 만든 최초의 고딕스타일 건축이 탄생하게 된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스타일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다.

생 루이(루이 9세) 왕과 모후인 블랑쉬 까스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잔존하던 건축물과 새로 건설되는 예배당 쪽의 조화를 우선으로 공사를 재개한다. 하늘로 솟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건물을 떠받치는 석조기둥을 좀 더 보강한다.

고딕건축의 특징인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 높게 솟은 열주들과 상하로 길쭉한 개구부를 갖는 창문들로 만든다. 왕족의 무덤으로 사용하는 지하의 납골당 공간을 위해 지상의 트랜셉트(본당과 부속 건물을 연결해주는 공간)가 넓고 크다.

 



쉬제흐 주교

1081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권유로 생 드니 수도원에 10살에 의탁된다. 수도원에서 10년동안 공부하는 과정에 장차 프랑스의 왕이 되는 루이 6세를 만나 친분을 쌓았으며, 1106년부터 중요한 외교적 직책을 맡는다.

1122년 주교에 임명돼 로마 교황청에서 6개월간 생활하면서 발달한 이탈리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프랑스에 돌아와서 로마식 바실리카 양식을 인용해 생 드니 성당건축에 힘을 쏟는다.

쉬제흐는 1112~1137년에 루이 7세의 자문역할을 맡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왕이 십자군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1147~1149년에는 섭정역할도 한다.

또한, 2차 십자군 전쟁 중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왕비와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루이 7세와 알리에노흐 왕비의 이혼이 가능하도록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얻어준다.

이혼한 프랑스 왕비 알리에노흐가 영국의 플랑따즈네 왕조의 시조인 헨리 2세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지방을 지참금으로 가져가는데, 이것이 영국과 백년전쟁의 씨앗이 된다.

 



왕들의 무덤

메로뱅 왕조부터 종교의 힘을 얻기 위해 최초의 프랑스 주교이며 로마지배 시기에 몽마르트르(순교자의 산)에서 처형당해 이곳까지 자신의 목을 들고 걸어왔다는 전설의 생 드니 신부의 납골당을 이곳 지하에 설치한다.

뿐만 아니라 왕족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왕족의 납골당고 설치한다. 필립 1세, 루이 7세, 루이 11세를 제외한 모든 왕들이 이곳에 묻혔고, 프랑스 왕 중에서 유일하게 성인의 반열에 오른 생 루이(루이 9세)부터는 왕비와 함께 묻혔다.

대혁명 후인 1793년 흥분한 시민군들이 왕들의 시체를 우물에 던져 버리는데, 조상들의 뼈를 1817년 한우물에서 찾아낸 루이 18세는 선조들의 관이 놓였던 자리에 검은 대리석을 깔았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친형 루이 16세와 형수인 마리 앙투와네트의 유골을 마들렌느 대성당으로부터 옮겨와서 1815년 1월 21일 조상들의 품에 함께 안장시킨다.

1824년 10월 16일 숨을 거둔 루이 18세의 장례식은 왕가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치러져 이 곳에 안장되는데 그의 관에는 ‘부르봉 가문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고 적혀있다.

그 옆으로 아무런 글씨가 없는 빈 무덤은, 1830년 대혁명으로 왕권에서 쫓겨나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836년 슬로베니아의 고히쯔 수도원에 묻혀있는 부르봉 가문의 진짜 마지막 왕 샤흘르 10세를 위한 것으로, 아직 옮겨오지 못하고 있다.

왕족이 아니면서도 특별히 이곳에 묻힌 사람으로는 브르따뉴 지방의 아름다운 성곽도시 디낭 출신으로, 프랑스 왕을 도와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기사 게클랑을 꼽을 수 있다.

 



수탈과 복원

 

프랑스 대혁명 시기인 1790년 성난 폭도들에 의하여 수도원의 보물들이 여러 번 수탈당하고 왕족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은 우물에 버려진다. 1793년에는 성당을 폐쇄했으며, 근처의 주민들이 지붕의 빗물막이 납을 녹여 사용하면서 성당을 완전 방치한다.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1805년부터 복원을 시작했고, 왕정복고인 1816년 루이 18세가 왕족의 납골당을 재건하도록 하면서, 부르봉 가문의 유해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나폴레옹 3세의 치하에서 대부분의 건축물을 복원한 비올레 르 뒥에 의해 복원건축이 시작되지만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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