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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수원화성의 수문(水門)

 

성(城)을 만들 때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 중 하나가 식수(食水) 확보이다. 유사시 고립이 장기화되므로 식량보다는 식수 확보에 따라 항전의 기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처음 계획할 당시 수원천을 성 내부로 끌어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천이 성을 통과함으로써 수문을 만들 수밖에 없는데 성곽에서 문(門)은 방어에 취약한 곳이다. 그래서 사대문 앞에 옹성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문(水門)은 대문과 달리 문을 여닫을 수가 없고 항상 물이 흐르도록 열어놓아야 하므로 대문보다 더 취약한 곳이 된다. 방어측면에서 보면 수원화성의 대문은 성곽과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방어는 그 앞에 설치된 옹성이 전담하고 있다. 이에 반해 수문에는 옹성을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곡성(曲城) 형태로 만들어 방어력을 보완했다. 곡성이란 문을 성곽 안쪽으로 꺾어 넣어 문을 숨기는 형식이다.

수문 하부구조를 보면 수문의 구조는 홍예로 돼 있으며 북(北)수문은 물이 들어오는 곳이고 남(南)수문은 물이 나가는 곳이다. 북수문은 홍예가 7개이고 남수문은 성안의 물이 더해져 북수문 보다 수량(水量)이 많기 때문에 홍예가 2개 많아진 9개로 돼 있다.

수문 상부구조를 보면 북수문은 수문 위에 누각인 화홍문(華虹門)이 있지만, 남수문은 포사(鋪舍, 군인이 머무는 참호)로 모양과 용도가 다르다. 북수문은 1794년 수원화성 1차 공사 때 만들어지고 남수문은 혜경궁의 환갑잔치가 끝난 2차 공사 때인 1796년에 축조돼 시기적 차이가 있다. 다산의 설계가 반영된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 고궁박물관 소장본)는 1795년 원행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완성되지 않은 성곽시설들도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남수문도 북수문과 같이 수문 위에 누각이 설치된 모습이 보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수문이 지금과 달리 누각으로 설계됐다는 것이다.

남수문의 설계변경 원인으로는 수문 위에 설치된 누각의 불합리성이라 본다. 축성을 시작하면서 정조는 성곽의 ‘누첩(樓堞)의 화려함은 적의 기세를 빼앗기 충분하다’라는 말을 하면서 ‘고금의 아름다운 제도를 모두 이 성(城)에 갖추게 하라’고 했다. 1차 공사는 대부분 설계변경 없이 이뤄졌고 북수문에는 누각이 설계대로 설치됐다. 그러나 2차 공사에서는 현장 감독관인 조심태와 이유경이 방어력을 위해 누각 대신 포사(鋪舍, bunker)로 변경했다고 볼 수 있다.

북수문은 물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적군이 물의 힘을 이용할 수도 있어 물이 나가는 남수문에 비해 방어가 불리하다. 또 남수문은 공격 시설인 남공심돈이 바로 옆에 있고 북수문의 주변에는 이런 시설이 없다. 방어적 환경에서 보면 북수문은 남수문에 비해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도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홍예 구조에서, 조적식(組積式, 벽돌이나 돌을 이용해 하나씩 쌓아 올라가는 방식)에 개구부를 만들 때는 구조적 안정을 위해 가로(폭)는 좁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북수문 홍예의 폭은 9척 높이는 7.8척이고, 남수문 홍예는 폭이 6.3척 높이는 9척이다. 남수문 홍예는 폭이 북수문의 2/3수준이고 높이는 더 커져 조적구조의 발달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공사 도중 방어력 향상을 위한 설계변경이 옹성과 공심돈 및 수문에서 일어났다. 돌홍예로 만든 북옹성 보다는 화공에 강한 벽돌홍예로 만든 남옹성이 강해졌고, 공심돈도 나중에 지어질수록 더 커지고 원형으로 되면서 강해진다. 이처럼 남수문도 북수문보다 한층 발전돼 하부 홍예구조도 튼튼해지고 상부도 포사가 돼 방어력이 증가했다.

정리하면, 북수문은 1차 공사시기에 만들어져 정조의 미학대로 아름답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2차 공사시기에 만들어진 남수문은 현장 감독관의 뜻이 반영돼 실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실용적이며 방어력이 더 나은 남수문 보다는 정조의 뜻이 담긴 미학적인 북수문을 더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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