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보다 차분한 봄이다. 축제 때마다 거리를 가득 채우던 음악이 들리지 않으니, 이렇게 조용히 봄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세월호 6주기를 맞아 다시금 밀려오는 슬픔을 작가들과 공감하러 미술관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필자는 세월호 1주기와 2주기 즈음 합동분향소를 방문하고 추모 전시를 관람하러 안산을 찾아갔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곳을 갔던 것은 일종의 순례였다.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하얀 돔은 국화 송이를 손에 든 추모객들로 가득했고 분향소에 흐르던 음악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참 구슬펐다. 필자와 함께 분향소에 왔던 네 살 된 딸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분향소의 슬픈 분위기에 눌려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곳을 직접 찾아가 보지 않고 단지 뉴스로만 시청했다면 6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필자의 심정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순례를 떠날 장소가 필요하다.
안산에서 진행된 세월호 추모 전시에는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수백 명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전시에 참여했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1주기 추모 전시 <망각에 저항하기>에는 304인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협소한 장소에서 미처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추모에 의의를 두고 불평하지 않았었다. 2주기 추모 전시 <사월의 동행>은 경기도미술관에서 진행되었고 304인의 참여 작가는 사전 신청과 공모에 의해서 선정되었었다. 2주기 즈음에는 참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세월호에 대해서 발언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또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그전까지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던 작가들이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전시에서는 조소희 작가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이고 기도하는 304명의 시민들의 손을 사진으로 담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주요 미술관들이 휴관함에 따라 세월호를 기억하고 아픔에 공감할 기회가 적어 공허한 봄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작은 규모의 전시장들과 갤러리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곳들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국공립미술관의 경우 전시 콘텐츠와 큐레이터의 설명을 온라인 동영상으로 올린 곳이 많다. 하지만 세월호 6주기를 맞이한 지금 그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전시는 현저히 줄었다. 1주기나 2주기 때 연출되었던 애도의 물결은 아니더라도 세월호에 대해 서로 어떤 심정인지 확인할 기회는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들 전시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여실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경기도미술관의 <우리와 당신들>은 인간이 주변과 기술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개체라고 상정하였고 이와 관련된 작품들을 홈페이지로 소개하고 있다. 필자의 집 주변에 위치한 SPACE9에서는 기획전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데 참여 작가 만욱은 동물원 속 동물들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틀에서 변형되고 있는 대상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화려한 색채로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기획하는 <덕수궁 프로젝트>는 야외에 설치된 덕분에 현재에도 운영되고 있으며,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과 감성을 피어오르게 하는 전시인 만큼 이 계절에 관람하기 좋은 전시인 것 같다. 백남준 아트센터의 온라인 기획전 <침묵의 미래: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도 인상적으로 봤다. 특히 안젤리카 메시티의 <말의 색깔>에서 수화로 이루어진 합창이나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은 왠지 짠한 감동을 주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세월호 참사로 겪은 아픔이 우리를 성숙하게 했고, 덕분에 우리는 코로나19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세월호 희생자들은 오늘날 수많은 생명을 지켜주고 있는 셈이다. 손에 봉선화 물을 들이고 하나 된 마음으로 올렸던 그때의 기도는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 그해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에게는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