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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여백] 순간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평소에 일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 생각이 반짝 떠오를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은 스치는 바람과 같아서 잡아 두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바람처럼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마련이다. 나중에 다시 떠올리려고 해봐도 그 분명했던 생각이 쉽게 되살아나지 않는다. 아무리 총명한 두뇌를 가진 사람도 기억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나 스쳐 가는 영감을 붙잡아 두기가 어렵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쉬지 말고 기록해라.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 이것은 바로 메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다산 선생의 말씀이다. 이처럼 다산 선생은 메모하는 습관을 바탕으로 500 여권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다산을 설명해 주는 말이 ‘둔필승총(鈍筆勝聰)’이다. 이 말 뜻은 “둔필의 기록이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다. 둔할지라도, 기록이 읽기보다 낫다는 말로 결국 ‘손이 뇌를 이긴다’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독서가였던 정약용은 책을 읽으며 중요한 것은 베껴 쓰고 이때 자기 생각을 덧붙여 메모했다. 글을 베껴 쓰면 영원히 기억으로 남는다. 기억은 유한하고 문장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결혼하고 셋방살이하던 새댁 때다.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매달 나오는 대로 계산하여 주인댁에 세금을 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 할머니가 지난달 요금을 안 냈으니 어서 달라고 했다. 나는 분명히 요금을 낸 줄 아는데 자꾸 우기셨다. 그 당시 가계부랄 것도 없는 작은 노트에 몇 월 며칠 주인댁에 돈을 낸 것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 노트를 들고 가 소위 증거물을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주인 할머니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착각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때 그 메모가 없었다면 아마도 꼼짝없이 돈을 지불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틈틈이 메모하는 습관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버스 안에서나 산책을 하는 길에도 늘 수첩과 펜을 갖고 다닌다, 수시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글귀를 메모하기 위해서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면서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수첩과 펜을 찾았다. 그런데 가방을 바꿔서 나오다가 그만 수첩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필통은 늘 갖고 다녔기에 급기야 나는 손바닥에 메모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손바닥에 쓴 메모를 먼저 노트에 정리해놓으면 그때 그 순간의 기억을 붙잡을 수 있다. 순간의 기억이 한 편의 시로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꼭 책을 읽을 때나.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했을 때에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항상 쉽게 접하고 있는 텔레비전에서 좋은 시상을 떠 올릴 때가 많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에 대한 방송이 나왔다. 여든다섯 살 평생을 시계공으로 살아온 장인을 보았다. 순간 뭉클하여 빠르게 메모를 하였다. 멈춘 시계는 고치면서 파킨슨병 아내를 살려내지 못한 안타까움을 장치하여 서정을 극대화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예지동 시계골목/ 시계공 박 씨, 고장 난 시간은 고치면서/ 끝끝내 파킨슨병 아내/ 살려내지 못했다// 문득 먼저 떠난 아내가 그리워질 때마다/ 더 바삐 일한다, 낡은 서랍 속 사진 보며/ 다소니 반짝 그 생애/ 째깍째깍 빈방이 운다//여든다섯 삶의 터전 시계방 오십 년이/ 손끝에서 재생된다, 지문이 다 닳도록/ 죽었던 시간의 골목/ 초침 소리 깨어난다.” - 진순분, <시계 골목 장인> 전문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단어나 문장이 나오면 메모를 해놓는다. 메모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메모지와 펜을 비치해 놓는다. 나이가 들면서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여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둔필승총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메모하는 습관을 생활화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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