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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풍류의 산실 '경아대' 다시 문 열어..10월16일 재개관식

잊혀진 인천 향제 풍류.고유의 소리 복원..문화재적 가치도 주목

 

 풍류(風流). 흔히 쓰이지만 딱히 정의하기는 어려운 단어다. “풍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멋도 없고 낭만도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풍류를 안다 함은 무엇보다 ‘멋’을 아는 것을 가리킨다. 요즘에는 허영심에 가득 차 돈을 함부로 쓰고 멋을 잔뜩 부리는 사람을 비꼬기 위한 말로도 가끔 쓰인다.

 

옛 조상들에게 ‘멋’은 곧 음악이었고 예술이었다. 학문뿐 아니라 자연을 즐기며 음악과 예술을 가까이 하는 태도, 그것이 풍류였고 또 사대부로서의 미덕이었다.

 

요즘 풍류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국악분야 쪽인듯 하다. 줄풍류·대풍류·풍류방·풍류객 등이 대표적인데 줄풍류·대풍류는 악기편성을, 풍류방과 풍류객은 각각 국악을 하는 곳과 국악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항구도시 인천에도 제법 풍류객들이 많았을 터, 1963년 문을 연 경아대(景雅臺)는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148㎡(45평) 남짓 정갈한 한옥에서 풍류객들은 시조를 읊고 악기를 다루며 서로 간 친목을 다졌다.

▲ 국악인과 지역민들이 함께 건립한 경아대

 

경아대가 건립된 지 올해로 57년째. 그러나 그 맥은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내리교회 앱윗청년회가 만든 고전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와 맞닿아 있다.

 

이우구락부는 일제 강점기 우리 음악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향제 줄풍류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모았다.

 

이우구락부는 국악공연 등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이름을 서서히 알려나갔다. 1920년대 동아일보 인천지부 기자들이기도 했던 구락부원들의 기록은 지금도 동아일보 라이브러리에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1930년대 일제가 한반도 전역을 병참기지화 하면서 이우구락부의 활동도 뜸해졌다. 동아일보에서도 관련 기사가 1927년까지 검색된다.

 

이두칠 선생은 이우구락부의 명맥을 잇는 인천 국악의 아버지다. 이우구락부로 전해내려온 인천 향제 줄풍류를 이어받아 경아대에서 가르쳤다. 향제 줄풍류는 각 지역별로 특색이 있는 현악기로 된 풍류(국악)로 인천의 경우 7명의 인원이 거문고, 가야금, 대금, 해금, 피리, 단소, 장구를 통해 느린 가락으로 연주한다.

 

처음 이두칠 선생과 일행들은 이우구락부를 계승하는 ‘인천 정악원’을 만들었으나 마땅히 연습할 공간이 없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기록에 따르면 김춘익외과와 명월관 등에서 연습했다고 한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국악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당시 류승원 시장에게 연습공간 마련을 요청했고, 시와 지역 유지들이 도움으로 경아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국악소리가 들리는 경아대로 찾아들었다. 개중에는 제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김응학 선생이 그런 예다. 1938년생인 김 선생은 경아대에서 이두칠 선생으로부터 국악을 배웠다.

 

느린 가락이 이어지는 줄풍류 특성상 어린 제자들은 이두칠 선생이 연주를 할 때 가끔 졸기도 했다. 이두칠 선생은 그런 제자들을 혼내기는 커녕 옥수수를 사오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신나게 옥수수를 먹고 나면 또 졸리기 일쑤. 제자를 가르치려는 스승과 졸음을 이겨가며 국악을 배우려는 제자들은 그렇게 인천 국악을 위해 헌신해왔다.

▲ 도시화, 그리고 갈등...안녕 경아대

 

경아대에 국악과 소리만 있던 것은 아니다. 시조와 무용, 창악 등 한국 전통예술이 모두 상존하는 공간이었다. 도시화와 전근대, 1960년대의 그 애매모호한 정체성처럼 경아대도 그러했다. 마치 도시화를 마지막 앞둔 전근대와 복고의 전야제처럼 뜨거웠다.

 

1966년 경아대는 한국문예사가 주최한 무용경연대회에서 특등 및 최우수상을 받았고 계몽사가 연 종합예술제에서 특별안무상을 수상했다. 1969년에는 전국시조경창대회를 주최하며 인천에 시조붐을 일으켰다.

 

1974년 주안에 인천시민회관이 생기면서 인천의 도시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인천의 중심이 중구와 동구에서 남구 주안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람들의 취향도 변해갔다.

 

조용한 바람소리와 어우러지던 현악기 소리는 우렁찬 포크레인의 돌 깎는 소리에 묻혀졌다. 사람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풍류가들 사이에서 점차 갈등이 일어났다.

 

서로 시간을 나눠 쓰던 경아대는 특정인이 제 집인 듯 쓰기도 했다. 한 풍류객은 자신의 가족을 데려와 숙식을 했다. 급기야는 서로간에 편을 나눠 다투기까지 했다.

 

갈등이 지속되자 인천 국악협회에 분규가 일어났다. 하나 둘 경아대를 떠나고 각자 편을 나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경아대를 찾던 풍류객들의 발길이 점점 줄어들었다.

 

국악의 콘텐츠 부족도 한 몫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국악을 듣지 않았다. 1970년대말 대학가요제가 등장하면서 가요가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외국 팝송에 열광했다.

 

1990년대 말 인천 풍류의 역사가 끊어지면서 경아대의 문도 닫혔다. 풍류객들은 숭의동 국악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 경아대가 있어야 하는 이유

 

중구 율목공원에 자리한 경아대는 148㎡ 남짓한 작은 한옥식 건물이다. 국악회관이 있는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도 반문할 수 있지만 어린시절 이곳을 자주 드나들며 자란 윤중강(61) 국악평론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서울대 국악과를 마친 뒤 동경예술대학 음악연구과를 졸업했다. 우리나라 1호 국악평론가로 활동하며 공연연출에 힘쓰고 있다.

 

그는 경아대가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인천 고유 풍류의 본산”이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지금이야 강단에서 국악을 배우지만 당시에는 각 지역마다 내려오는 풍류가 있었다. 인천 고유의 향제 풍류는 경아대에서 시작됐고 이우구락부에서 경아대로 이어져 온 이두칠 선생의 직계 제자인 김응학 선생 역시 경아대에서 배우고 활동했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도 충분하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다른 지역의 향제 풍류는 대부분 무형문화재이나 인천은 아직까지 지정받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지역 풍류가들은 김응학 선생이 강단 국악인이 아니라는 점과 인천 풍류 자체가 강단의 국악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윤 평론가는 “경아대는 그 자체로 국악교육원이었습니다. 강단처럼 이론화되진 않았지만 살아있는 전설들과 함께 연주하고 배우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었죠. 지금이야 강단이 아니면 국악을 배우기 힘들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경아대가 있었기 때문이죠”

 

국악에 전혀 뜻이 없었던 윤 평론가를 국악의 길로 이끈 것도 경아대였다. 어린시절 경아대에 놀러가 국악 연주를 구경했던 기억이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문화재위원이기도 한 윤 평론가는 문화재로서 경아대의 가치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경아대 사진을 제 SNS에 올렸는데 건축을 전공하시는 한 교수분이 콘크리트 원형기둥에 목조 겹처마 등 전체 모습이 만들어내는 정경에서 당시의 건축 문화가 느껴진다고 평하셨습니다. 단순히 옛날건물이 아니라 문화재로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김재익 중구 부구청장은 경아대를 둘러 보고 “적절한 활용방안을 강구해보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올해 홍인성 구청장의 지시로 경아대가 재개관했다. 홍 구청장은 10월16일 간략하게 개관식을 진행했다.

 

윤 평론가는 재개관 당일 ‘경아대와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경아대는 11월30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며 윤중강 국악평론가의 강연과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이수자 조현일과 이화영, 기인숙의 '천안삼거리', '내 고향의 봄' 등 무대가 펼쳐진다.

 

중구는 경아대 대표 인물들의 인터뷰와 전시내용 등을 영상에 담아 보존하는 사업도 추진, 인천 국악 역사 콘텐츠로 활용할 계획이다.

 

윤중강 평론가는 “단순히 추억하기 위해 경아대를 살리자는 게 아닙니다. 그 것은 잊혀져 가는 인천 향제 풍류의 복원이고 인천의 소리를 오롯이 살려 내는 것입니다. 경아대가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분명 인천 국악의 브랜드화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고 각오를 다졌다.

[ 글 = 김웅기 기자, 사진 = 중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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