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가짜뉴스는 여론을 왜곡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해치는 독이 된다. 올해는 1991년 5월의 민주화투쟁이 어언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 해 유서대필이라는 희대미문의 가짜뉴스가 12명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매도했었다. 그로 인해 독재정권의 연장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도 접어야 했다.
가짜뉴스가 의제로 거론되면 학자들은 가짜뉴스의 개념 정의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전문가인 시민들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걸 정의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가짜뉴스란 표현은 메타포(metaphor)다. 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메타포는 직관적으로 정곡을 찌르는 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론이 위축된다는 엄살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우려가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대한 언론단체들의 반응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 언론의 신뢰도는 우주에서 꼴찌다. 저널리즘의 본분을 망각한 상태에서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하면서 정파적 목적으로 허위날조보도를 남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법적 책임도 지지 않거나, 또는 배상액이 터무니없이 가벼워서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언론을 위축시키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지도 않는다. 저널리즘의 정도를 지킨다면 어떤 징벌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지점은 누구를 위한 언론 · 표현의 자유이며 권리인가 하는 의문이다. 만인을 위한 권리인가, 만 명을 위한 권리인가?
봉건지배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언론 · 표현의 자유는 자산가계급의 권리로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산가계급에 해당하는 거상과 부농 및 성공한 수공업자들은 노동자 농민들을 규합해 봉건지배세력을 대상으로 봉기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성립시켰지만 권력은 자산가계급이 독점했다. 당연히 언론 · 표현의 자유도 독점했다.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투쟁했고, 희생을 치른 만큼 아주 조금씩 언론 · 표현의 자유를 쟁취해냈다. 그러나 여전히 표현의 수단인 언론은 자산가계급의 수중에 있고, 서민대중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진보적인 언론단체들이 언론 ·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징벌적 손해배상법제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언론 ·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다. 근대의 여명기에 자산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던 소위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고안해낸 천부인권사상에 학자와 기자들이 주술처럼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가짜뉴스는 사회적 흉기일 뿐이다. 유해식품은 소수 사람들의 몸을 망가뜨리지만, 가짜뉴스는 대다수 사람들의 건강한 자아형성을 방해함으로써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미 병이 깊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회사의 명운과 개인의 인생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주어야 한다. 무책임한 허위날조보도로 인해 멀쩡하던 회사가 망하고 죄 없는 사람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영업의 자유와 샐러리맨 기자들의 방종에 가까운 자유가 더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