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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마지막 가는 길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민중가요 <님을 향한 행진곡>이 가사처럼 '남김없이' 온종일 울려 퍼졌다. 故 백기완(1933∼2021)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뒤따르던 조문객들은 비통한 표정으로 울먹임을 참았다. 몇몇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시민들은 통일 운동에 일생을 바친 고인의 곁을 지키며 영면을 빌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19일 서울광장에서 엄수됐다. 추모 행렬은 하루 동안 끊이지 않았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 주관으로 이날 오전 8시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발인식에는 한국 민중·민족·민주운동의 큰 어른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려는 인파가 몰렸다. 

 

백기완 소장의 영정 사진 앞에서 큰절을 올린 유족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상주를 맡은 고인의 아들 백일씨는 "우린 민중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흐느꼈다. 발인을 마치고 장례위원회가 운구 행렬을 이끌었다. 유족들은 물론,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시민 수백명의 행진이 이어졌다. 

 

이들은 민중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 '남김없이'가 쓰인 리본과 백 소장이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머리띠를 달고 있었다. '노나메기 세상(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이라고 적힌  흰색 마스크를 착용했다.

 

 

운구 행렬은 백 소장을 형상화한 대형 한지 인형, 대나무 깃대에 달린 붉은 만장, 꽃상여, 수십 명의 풍물패를 앞세우고 통일문제연구소를 거쳐 노제 장소인 대학로 소나무길로 이동했다. 노제는 박래군 상임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시작됐으며, 추모객 200~300명이 참석했다. 

 

 

노제 장소인 대학로 소나무길에는 백 소장이 1984년 설립해 운영한 통일문제연구소가 있다. 위원회는 백 소장이 생전에 매일 찾아 커피를 마셨던 서울 종로구 '학림다방'을 방문해 고인을 넋을 기렸다. 이충렬 학림다방 대표는 고인을 추모하며 직접 내린 커피를 백 소장 영정 앞에 올렸다.

 

노제 시작되고서 김세균 상임장례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선생님은 평생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의 일원으로 살았고 백발의 노인이 된 뒤에도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였다"고 밝혔다.

 

박석운 상임장례위원장도 조사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이 땅의 민초들은 선생님을 잃은 슬픔으로 목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다. 

 

조사가 끝난 뒤 한국민족춤협회는 집단무로 백 소장을 기렸다.

 

운구행렬은 9시55분쯤 노제를 마치고 이화사거리, 종로 5가, 종각역 사거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시민들이 뒤따라 걸으면서 더욱 많은 시민들이 몰려 들었다. 오전 10시50분쯤 종각역 사거리에 도착해서는 거리굿 공연을 했다. 이는 백 소장의 뜻을 기려 전통 장례 형태로 진행됐다.

 

 

영결식은 오전 11시 30분쯤 서울광장에서 엄수됐다. 미리 광장에서 기다리던  추모객 1000여 명이 백 소장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장례위원회 측은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구역을 나눠 99개의 의자를 설치했다. 

 

영결식은 신철영·신학철 상임장례위원장의 초밝히기로 시작해 416합창단·이소선합창단·평화의나무합창단의 <님을 향한 행진곡> 합창으로 이어졌다.

 

백 소장과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는 "앞서서 나아가셨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그 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투쟁현장에서는 늘 힘들고 지치기 마련인데 이제는 어느 누가 우리들에게 그렇게 큰 어른 역할을 해 줄 수 있을까"라고 했다.

 

가수 정태춘씨의 추모곡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고, 백 소장이 생전에 즐겨부른 <민중의 노래>를 합창했다. 시민 헌화를 끝으로 영결식은 종료됐다.

 

 

서울을 출발한 운구 행렬은 오후 3시 20분쯤 장지인 남양주 모란공원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님을 향한 행진곡>을 부르는 추모객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추모객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투쟁하자던 백기완 선생님의 외침을 기억합니다‘라고 쓰여진 현수막을 내걸고 고인을 반겼다.

 

 

상여꾼들은 백 소장의 관을 들어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장지에 내려놓았다. 백 선생의 하관식에 참석한 200여명의 시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백 선생의 머리맡에는 ‘한반도기’와 함께 영정사진과 위패가 놓였다. 

 

큰 아들 백일씨는 “아버님을 기리는 말로 한국 진보운동가, 민주운동가, 거리의 혁명가 등이 있다. 오늘 안타깝게 민주운동의 지도자라 불리는 그분이 타개했다”며 “이젠 우리가, 여러분이 백기완이 돼야 한다. 또 다른 지도자가 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백 소장은 노동해방을 외친 전태열 열사와 나란히 영면에 들었다.

 

 

백기완 선생은...

 

1960년, 4·19혁명에 뛰어들어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1966년에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끝내기 위한 염원을 담아 재야 연합전선의 하나로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와 야권 통합운동을 성사시켰다.

 

1967년 당시 독립운동가 장준하와 함께 계획한 백범사상연구소 설립은 탄압으로 무산됐고, 1972년에 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충무로에 개소했다.

 

1979년 민주청년협의회를 결성했고, ‘명동 YMCA 위장결혼사건’으로 전두환 서빙고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구속수감됐다.

 

1980년에 병감정유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중항쟁 소식에 분개하며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결성으로 1990년대 활동을 시작했다. 또 1991년 재야인사 3·1절 시국 선언, 한반도 비핵화 1000인 선언에 이어 1992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일생을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 높여온 고(故) 백기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진보진영의 원로인 그는 2월 15일 투병 끝에 하늘의 별이 됐다.
 

[ 경기신문 = 김민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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