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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숙영의 젠더프리즘] ‘감히’가 아니라 ‘왜’

2019년 말 발표된 논문 한 편이 근래 들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남성을 벌레에 비유하고 비하했다는 이유로 청와대 국민청원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 유명 유튜버는 이 논문이 자신을 ‘여혐’으로 몰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편 직접 학자의 연구실을 찾아가고, 학술단체 임원과 대화한 내용을 공개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해당 논문을 읽어보면 주제가 불법 촬영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이 논문이 혐오와 차별의식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신랑‧신부의 초야에 문구멍을 뚫어 엿보거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무언가를 몰래 보고, 금지된 것을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시선이 남성을 중심으로 하며 범죄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관음증의 표현과 실행이 온라인으로 넘어오면서 더욱 강도가 세지고 집단화되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여자 친구와 애인, 엄마, 누나, 여동생, 사촌 등 주변 여성들의 샤워하는 모습과 옷을 갈아입는 장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모습을 공유하며 은밀함을 즐긴다. 갈수록 수위는 높아져 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약물을 투여해 집단 강간하고 고문하는 스너프 필름(snuff film: 실제 성행위 장면이나 잔혹한 고문과 살인 장면 등을 찍은 영상물)의 형태로 나아간다. 이런 불법 촬영 범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를 밟으며 진화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혐오 유튜버들의 자극적인 영상물에 노출된 소년들은 여성에 대한 비하나 혐오가 담긴 용어를 사용하고 놀이처럼 즐긴다. ‘보이루’라는 인사말을 비롯해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를 접두어로 붙인 ‘보징어’, ‘보슬아치’, 상대의 부모에 관한 욕으로 이른바 패드립(패륜+애드리브)이라고 불리는 ‘느금마’, ‘xx년’, ‘엠창’은 대부분 어머니에 한정돼 있다. 이런 환경에서 소년은 여성을 멸시하는 것이 남자답다는 것을 수용하고 학습하며 성장한다.

 

남초 커뮤니티와 또래들 간의 채팅방에 텍스트를 넘어선 이미지와 동영상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단순 수용자를 넘어 직접 만들어 공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소위 ‘몰카충(관음충)’이라고 불리는 불법 촬영 범죄자가 탄생하는 시점이다. 성 평등과 성인지 관점에 관한 교육이 어린 시절부터 시행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삐뚤어진 시각이 그 상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남성을 가리키고 아줌마는 여성을 가리키지만 이 두 단어는 동등하지 않다. 아저씨는 주로 누군가를 지켜주고 든든한 가부장제의 가장을 의미하며 듣는 아저씨가 기분 나쁜 경우가 드물지만, 아줌마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얕보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남성 배우자를 지칭하는 ‘남편’의 상대어인 ‘여편’은 사용되지 않지만 ‘여편네’는 여성 배우자를 깔볼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언어는 평등하지 않으며 곳곳에 편견이 깔려 있다.

 

대학 교수가 되어 각종 위원회나 심사에 참여하며 매번 느끼는 건 내가 안 왔더라면 여성의 비율이 더 낮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각 분야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여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남성과 여성의 언어와 역할, 그리고 신분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비대칭의 뿌리를 깊이 드리우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을 읽으며 ‘감히’라는 부사가 아니라 ‘왜’라는 의문사를 사용해 보라고 하면 지나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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