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종이에 눈동자를 베인 것처럼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작은 십자가 달린 묵주가,
손목에도 목에도 심장에도
주렁주렁 달고 다닐 묵직한 묵주가 필요하다니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니까
불의 나날을 맨발로 버티며
검은 보자기로 태양을 덮어 버리고
잠시 어둠 속에 머물면서
마음이 착해지기를 기다리고 싶은 순간들
그런 날들이 있지
당신은 그냥이라고 말하지만
구겨진 종이 같은 얼굴로
새로 산 묵주를 들고 축성 받는 순간에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속 돌덩이
다시는 순수해질 수 없다는 것*
그냥이라는 말이 주는 무거움
명동성당 성모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사내의 목 없는 뒷모습을 보며
그건 그냥이 아니라니까
* 조정권, <화해> 중에서
약력
▶ 대전 출생.
▶[서정시학](2007)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슬픔이 움직인다』. 연구서 『정체성의 형성과 한국 현대시』 등.
▶현재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 인문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