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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사원(寺院)이 있는 도시

 

 

창밖에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고흐가 생 뽈(Saint Paul) 정신병동에 들어간 1889년 어느 여름날, “그가 본” 바깥 풍경이었다.

 

고흐가 화실로 썼던 방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남아 있는 이곳은 본래 11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었다. 1605년 프랜시스코 교단의 한 수도자가 여기에 정신병동을 세우자 아예 그렇게 역할이 바뀐 지 오래였다.

 

별이 빛나는 밤, 그 탄생

 

빈 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태어난 자리는 “침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그림 바로 옆 작은 방이었다. 고흐에게 특별히 주어진 화실이었다. 생 뽈 시절은 기묘하게도 고흐에게 가장 많은 작품들이 그려진 시기였다.

 

그의 정신은 뭔가에 감전된 듯 폭발 상태였다.

 

고흐에게 힘겨웠던 건 밤에 본 풍경을 낮에 되살려 그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을은 근처 생 레미(Saint Remy)를 떠올렸다.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출생지로 유명해 사람들이 법석거리는 이곳을 그는 조용한 시골동네로 바꾸어 그렸다.

 

한 켠에는 사이프러스(Cypress)라고 불리는 측백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높다랗게 서 있다. 12세기에 세워진 생 마르탱(Saint Martin) 성당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고 주변 언덕은 출렁이는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서 압권은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달과 함께,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무엇과 만날까?”

 

돈 맥클린의 “빈센트”

 

돈 맥클린(Don McLean)이 1971년 빈센트 반 고흐를 위해 부른 노래 “빈센트, 별이 빛나는 밤(Vincent, Starry starry night)”은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올라 전 세계에 퍼져나간 노래다.

 

돈 맥클린은 고흐의 전기(傳記)를 읽다가 그가 미친 게 아니었고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했을 뿐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어느 여름 날의 풍경을 내다 보렴, 내 영혼의 어느 자리인가에 어둠이 깔려 있다는 걸 깨우친 시선으로 말일세...이제야 빈센트 당신이 무슨 말을 그리도 애써 내게 하려 했는지 알아듣겠어. 얼마나 고통스럽게 자신의 영혼을 도닥거리며 일으켜 세우려 했는지. 그래서 그 영혼이 자유함을 얻게 하려 했는지.

 

하지만 세상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어. 그래도 이제는 들으려 할지 몰라.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밤이여.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긴 인상은 색감의 선택이었다. 고흐의 세계에서 색은 온통 격렬하게 춤을 춘다. 감당하기 어려운 파도다.

 

나의 감상평은 이런 것이었다.

 

 

그림 앞에 서다

 

“내게는 밤하늘에 폭풍이 몰아치는 게 보인단다. 별은 그렇게 폭풍 속에서 태어나는 게 아닐지? 때로 자기 인생에 거센 바람이 몰아쳐 오는 것 같은 날이면 두려워말고 내 안에서 별이 태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 순간 이 그림은 청춘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 이 그림 앞에 설 때 이들이 만나게 되는 건 때로 자신의 삶이 겪어내는 고통과 그걸 넘어서 보게 되는 새로운 미래이면 싶다.

 

이게 빈센트가 정작 하려던 이야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흐의 영혼을 뒤흔든 빛의 소용돌이는 정물화가 아니었다. 살아움직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

 

다시 그림을 본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묘목이었을 사이프러스가 어디까지 자라는 걸까? 고흐의 영혼의 키는 그렇게 높았다.

 

생 레미 마을 중심에는 생 마르탱 성당이 서 있다고 했다. 고흐 곁에는 그를 돌봐주는 프레데릭 살르(Frédéric Salles)라는 개신교 목사가 있었다. 생 뽈 병원은 수도원의 풍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백년 된 사원(寺院)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젊은 날 신학생이었고 선교사의 경력까지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신세계를 말해준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고흐는 탄광의 광부를 비롯해서 최하층 빈민들에게 다가가 열정적인 선교를 했던 바 있다.

 

“성직자 고흐”, 상상하기 어렵다.

 

굴곡 많은 인생사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서 사원이 무너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늘까지 닿아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생 마르탱 성당으로 표현된 성소(聖所)는 그가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던 정신의 열망과 거처였다. 시대와 불화했던 한 빈곤한 천재화가의 고독을 치유해줄 유일한 보루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별들, 그 빙빙 돌아치는 광선의 환영에서 예기치 않은 천체의 무도곡(舞蹈曲)을 듣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신탁(信託)에 귀가 열린 자에게 허락된 은총이다.

 

 

신탁의 힘과 소크라테스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polis) 정치”를 발명했다. 도시 국가의 운명을 치열한 이성의 논쟁으로 풀어나가는 작업은 “로고스(logos)의 건축가”들을 출몰하게 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연 선두다. 로고스는 이성의 정점에 있는 사유의 원리다.

 

인류 역사 최고의 지성 플라톤에게도 넘을 수 없는 스승이 있었다. 그 스승은 그리스의 정신을 혼란케 한 죄목으로 독배를 마시는 사형에 처하고 만다.

 

왜 그런 처형을 당했던 것일까? 당연한 것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질문하는 소크라테스는 답이 궁색해지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했다. 결국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성의 건축가들을 기른 이와 신탁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러나 신전은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중심이다. 정신의 절대적 거점은 시민들의 광장 아고라가 아니었다. 신전을 거쳐 아고라이지, 아고라의 변두리에 신전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이 신의 음성에 의심을 품는다. 그럴 리 없다는 겸허한 자의 본능이다. 신탁은 그에게 정치조직 민회로 가지 말고 시민들의 삶으로 들어가라고 이른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시작되는 현장이었다.

 

질문받는 자들의 무지가 드러나고 폭로되는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이런 소크라테스가 대다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질서 위에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반가울 까닭이 없다. 이른바 자만 또는 오만으로 번역되는 “휴브리스(hubris/hybris)”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도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쫓아도 계속 들러붙는 ‘등에(gadfly)’같은 존재였다. 영구적 추방이 필요했다. 신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 한 죄가 그에게 씌워졌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심판한 재판을 도리어 유죄로 판결한다. 신탁을 왜곡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들이었다.

 

휴브리스와 사원

 

 

고대 그리스가 신화와 신전의 도시라는 것을 잊으면 철학의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성을 초월하는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이가 이성의 머릿돌을 놓는다. 어느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칸트가 모든 윤리적 사유의 기본인 양심을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신의 목소리”라고 한 것도 그런 각도에서 깊게 짚어볼 바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심층의 육성, 그걸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는 현실의 소란스러운 아우성과는 다른 소리가 들린다. 정신의 깊이를 깨우치는 힘을 가진 존재가 세상을 바로 잡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사원이 사라진 시대와 도시, 그리고 역사는 이성으로 가장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주장의 난투극에 빠질 뿐이다. 그래서 매일 혼탁한 구정물로 시작하고 그걸 서로 내뱉고 마시면서 하루를 끝낸다.

 

아고라만 번창한 폴리스는 허물어져가는 신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뻐기는 휴브리스의 지배가 판을 칠 뿐이다. 그건 강하나 의롭지 못하다. 그래서 악이다.

 

이런 곳에는 사이프러스의 키가 자라나는 마을도 없고 성당의 종소리는 폐기된 지 오래이며 휘몰아치는 별들의 춤에 눈뜨는 이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이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구나.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지켜라. 오갈 데 없는 고아와 과부를 보살펴라.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려 들지 말라.”

 

신탁을 받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다. 모든 사원은 인간의 불의한 오만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비를 귀하게 여긴다.

 

폭풍이 몰아쳐 오고 있어도 별이 태어나는 걸 보지 못하는 시대는 봄에도 춥다. 모두가 고독해지고 우울한 싸움에 나날이 지쳐갈 뿐이다. 정신의 역병에 맥을 못 추게 된다.

 

자기 집보다 먼저 사원을 세워야 할 일이다. 그래야 집을 제대로 지을 수 있다. 정신의 거점이 무너진 처지에 무엇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열린 사원이 있는 도시가 보고 싶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워한다면. 더는 빈센트를 외롭게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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