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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코끼리를 묶은 밧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기습해오자 고대 로마인들이 더욱 놀랐던 것은 코끼리 군단이었다. 말들이 두려워 날뛰자 로마의 기마병들은 어찌 되었겠는가? 소총부대 앞에 난데없이 탱크여단이 나타난 격이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코끼리를 어떻게 길들인 것일까? 기둥에 매어 단다고 해도 기둥 채 뽑아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 코끼리를 조련하는 방법

 

인도의 오래된 이야기라고 한다. 어린 코끼리를 굵고 튼튼한 줄로 발을 묶어 말뚝에 매어 놓는다. 아무리 기를 써도 말뚝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해버리면 점차 코끼리는 밧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자라난 코끼리는 발에 줄을 “묶기만 해도” 그 큰 몸집이 뿜어내는 힘을 알아서 포기해버린다고 한다. 조작된 의식은 행동을 통제하고 본래의 능력까지 제압해버릴 수 있다.

 

한국 전쟁의 비극과 분단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은 최인훈의 작품 ‘광장’의 주인공은 이명준이다. 이어 쓴 ‘회색인’의 주인공은 같은 “준”자로 끝나는 독고준이 주역이다. 준(俊)은 뛰어났다는 뜻도 있고 6월을 의미하는 June이기도 하다.

 

6.25 한국전쟁의 서사가 박힌 명명(命名)이다. 따지고 보면 이 나라 전체가 아직도 “준”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는 역사에 속해 있다.

 

독고준이 한국사를 환상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가 ‘회색인’의 속편 ‘서유기’에 담겨 있다. 서유기(西遊記)라는 제목은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거쳐간 정신사의 유랑을 빗댄 은유라고 할까. 그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요괴들과 마주쳤는가?

 

독고준도 요괴에게 붙잡힌다. 이미 해방이 되었는데도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던 것이다. 독고준은 ‘이 자가 일본이 손든 걸 모르는 모양이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 해방된 조선 땅의 일본 헌병

 

졸병이 보고한다. “수상한 놈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상관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 자식아, 조선놈을 잡았는데 수상하면 어떻구 아니면 어떻다는 거야? 조선놈이면 그만이야, 알았나? 조선놈이면 나쁜 놈이야. 조선놈이기 때문에 수상한 거야. 증거가 있어서 수상한 게 아니란 말이야. 조선놈이기 때문에 증거가 있을 터이고, 그 증거는 수상한 게 틀림 없단 말이야, 알겠나?

 

조선놈이니까... 에익, 이 밥통 같으니라고.

 

졸지에 죄인이 된 독고준은 뼈저리게 느낀다. 해방이 되었어도 변한 건 없구나! 그러나 그건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실제로 몸은 조선사람이나 그 머리는 일본 헌병인 자들이 1945년 8월 15일 이후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 후예들이 지금까지도 어떻게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서유기'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조선 땅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제국의 첩자들은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내보내는 비밀 단파방송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식민지 당국이 극력 인멸코자 했던 종족적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열등의식의 방향으로 유도했던 국학이 점차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제국이 절대 이권을 주장해야 할 조선반도가 이같이 방자한 자유인이 될 때 그 같은 이웃을 가진 제국은 질식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일말의 희망은 남아 있었다. 제국의 방송은 다음 대목에 들어가면서 목소리를 잠시 낮추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서 마치 비밀을 누설하는 분위기다.

 

“조선의 노예들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그리웠던 발길질과 뺨맞기, 바가야로와 센징 하던 그 그리운 낱말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 “덴노 헤이까 반자이!”의 밧줄

 

아니나 다를까, 관동군 출신의 한 조선인 장교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일본제국이 밀어붙인 만주국 프로젝트를 고스란히 관철시키자 “덴노 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수준의 찬양이 나라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자가 일본 헌병과 피를 나눈 동지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지고 “수상한 조선놈들”을 잡아 족치고 죽이고 남몰래 매장했다는 사실도 쉬쉬했다.

 

지난 날의 그리웠던 발길질과 뺨맞기였다. 바가야로와 센징 하던 그 그리운 낱말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코끼리들의 순종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밧줄의 기억은 어찌 그리도 질기고 질긴지 세대를 넘어 지금도 위력을 발휘한다.

 

수상한 놈들 싹 다 잡아들여! 증거가 있어서 수상한 게 아니라니까. 조선 놈이면 나쁜 놈이야. 이 밥통 같은....

 

해방이 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일본 헌병의 난폭한 통치는 여기저기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거짓말로 모략하고 함부로 감시, 사찰하고 잔혹하게 이런 저런 폭력을 휘두르고 아무나 수상하다고 찍으면 잡아넣고 그래서 절세의 영웅 칭호까지 받는 세상은 해방된 조국이 아니다.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아닐세, 고개를 가로 젖기만 하면 알아서 감춰주고 변론해주는 언론은 하나 둘이 아니다.

 

요즘 갑자기 ‘덴노 헤이까 반자이!’ 찬가가 또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어린 코끼리의 발에 오래 전부터 밧줄을 묶어둔 자들의 음흉한 기획이다.

 

그런데 돌격! 하면 무조건 돌격하는 코끼리 떼가 되어버린, 코가 길어 슬픈 짐승들은 결국 패잔병이 되고 만다. 이긴 것은 한니발이 아니라 로마의 스키피오였다.

 

“코끼리들의 반란”, '서유기 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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