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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광고로 세상 읽기] - ① 일제 강점기의 인단 광고

 

- 연재를 시작하면서-

'광고로 세상읽기'란 제목으로 시리즈의 문을 엽니다. 매 회마다 동서양과 시대를 넘나드는 광고 작품을 선택한 다음 그에 얽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속살을 살펴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이 광고를 단순히 제품 팔고 브랜드 이미지 높여주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광고는 그런 마케팅 수단의 의미를 넘어 사람들 모듬살이에 중요한 영향 미치는 엄연한 사회적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현대인들에게 샤워와 면도 그리고 양치질 습관을 처음 심어준 것이 바로 광고의 힘이었습니다. 미국의 광고학자 셧 잘리(1990)는 지적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 고유한 성적 정체성(gender identity)을 형성하는데 있어 광고가 매스미디어 못지않은 핵심 역할을 한다고.

또 한 가지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광고가 ‘세상의 거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입고, 쓰고,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되비춰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광고는 인간을 둘러싼 당대의 환경들이 교집합된 일종의 종합적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현란한 설득기술의 장막 뒤에 정체를 숨긴 광고의 심층적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이 재미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세상살이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의미도 크구요. 앞으로 저와 함께 그런 흥미로운 산책을 한번 떠나보시지요.

 

조선일보에 실린 광고 하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요즘 핫 이슈입니다. 하버드 법대 램지어 교수가 쓴 황당한 거짓 논문 때문이지요. 그래서 '광고로 세상 읽기' 첫 번째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에 집행된 광고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아래에 ‘모리시타 인단(森下仁丹)’ 광고가 있습니다. 인단이란 오늘날의 은단(銀丹)을 말합니다. 입을 상쾌하게 하거나 기분전환용으로 쓰이지요. 하지만 이 시대의 인단은 그런 가벼운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무소불능의 상비(常備) 치료약으로 광고되고 팔려나갔습니다. 차멀미, 뱃멀미, 두통과 현기증, 가슴이나 배의 통증, 과식, 설사를 치료하고 심지어는 전염병 예방약으로도 쓸 수 있다고 효능을 과장했어요.  

 

1937년 12월 22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아래 광고를 자세히 볼까요. 화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사진에, 웃통 벗은 젊은 남자 두 명이 가슴 쑥 내밀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머리에 쓴 모자 모양을 보니 일본군입니다. 그런데 오른쪽에 내리닫이로 배치된 헤드라인이 심상치 않습니다. ‘축(祝) 남경함락(南京陷落). 이 건강(健康)이 이긴 것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인단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요. 문제는 이 광고에서 말하는 전쟁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있습니다. 바로 일제의 침략전쟁이었던 겁니다.

 

일본 관동군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北京) 외곽에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조작해서 중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이후 파죽지세로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하고 마침내 1937년 12월 1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지요. 맞습니다. 조선일보에 게재된 이 광고는 바로 그 승전(勝戰)을 축하하기 위한 겁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콘텐츠를 식민지 조선의 무지와 굴종이 만들어낸 희대의 반역사적 결과물로 평가합니다.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에 견마지로를 다하던 당대 주류 미디어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고.

 

이 사건은 보통 난징대학살(Nanking Massacre)로 불립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1월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재판’은 선언합니다. 난징 점령 과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대량학살로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35만 명의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이지요. 전쟁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은 물론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으로, 그것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으로 살해했다는 겁니다.

 

12월 13일 새벽 4시 부로 도시를 완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릅니다. 부녀자와 아동 강간은 일상이었고 총알을 아낀다는 명분으로 생사람의 목을 칼로 치거나 난자해서 살해했습니다. 그밖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산채로 땅에 묻거나 몽둥이로 때려 죽였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지요. 충격적인 것은 총검술 연습이나 목 베기 시합용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겁니다. 사진으로 첨부된 당시 기사를 보세요. 누가 빨리 100명의 목을 베는가를 겨루는 시합, 이른바 ‘100인 참수 경쟁’이 반복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난징 북쪽에 있는 무푸산(幕府山) 근처에서 가장 대규모의 학살이 벌어졌는데 이곳에서만 무려 5만 7천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시신 묻을 구덩이가 부족해서 대부분을 양쯔강에 그냥 버릴 정도였지요. 1912년 생으로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요미우리신문 종군특파원 오마타 유키오(小俣行男)는 그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줄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있던 포로들은 자기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서 목 잘린 사람들의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 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다음날 일본군은 포로들을 일렬로 세운 다음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포로들은 총알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에서 파견된 종군기자가 쓴 글이란 걸 감안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포로’라고 표현했지만 희생자 중 대부분은 멀쩡한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을 감춘 겁니다. 자, 이 광고가 언제 게재되었는가를 계산해보시지요. 난징 점령 9일 후입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될 극악무도한 학살이 한창 진행되던 시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고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인단’을 먹고 키운 체력이 그 같은 전쟁범죄의 원동력이 되었다 찬양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얼이 빠진 메시지입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 바보처럼 눈과 귀를 막고, 외세(外勢) 제국주의 권력이 전달하는 대본을 무조건 암송하고 있습니다. 악을 직접 행하는 세력이 가장 문제지요. 하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맹종하고 확산시키는 이런 자들 또한 못지않은 악의 실행자들입니다.

 

집행된 지 84년이 지난 이 작품은 광고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두려운 자료입니다. 식민지 조선인들의 시야를 차단하고 검은 것을 흰 것이라 부르도록 새빨간 거짓 선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죄업(罪業)과 함께, 광고가 그릇된 목적으로 이용될 때 얼마나 세상의 독(毒)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증한 사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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