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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땅’이란.....”

 

 

“농민들은 죽어간다. 그들은 이 죽음에 익숙해져 버렸다. 아이들의 죽음, 여성들의 과중한 노동, 특히 노인들의 기아 등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농민들이 가난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대낮처럼 명확해졌다.”

 

톨스토이의 작품 《부활》에 등장하는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고백이다. 그가 말하는 “가난의 이유”란 무엇일까?

 

“농민들의 유일한 수입원인 토지가 지주들에게 약탈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먹여 살릴 토지가 그들의 손에 있는 게 아니라 소유권을 행사하며 농민들의 노동력으로 먹고사는 자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었다.”

 

- 가난의 이유

 

그 자신도 지주이자 귀족인 네흘류도프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있다. 그는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토지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을 농민들의 공공자금으로 쓰겠다고 하자 토지 관리인이 묻는다.

 

- 그러니까 토지 소유권을 포기하는 대신 이 공공자금의 이자수익을 가져가시겠다는 거지요?

“아니요, 그것도 포기합니다. 토지가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당신도 이해해야 합니다. 토지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만인의 소유입니다.”

- 그렇게 되면 나리의 수입도 없어질 텐데요.

- “네, 저는 그 수입도 포기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을 전해듣게 될 농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한편, 20세기가 시작되는 중국 혁명 초기에 우리가 듣게 되는 날카로운 외침 하나가 있었다.

 

“정치하는 자들은 뇌물을 받는 무리이며, 부자들이란 나라를 도둑질하는 괴수들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의회라는 곳은 인민을 유혹하여 제대로 말을 못하게 만들고 저들끼리 패거리를 지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울 뿐이다.”

 

- 민생주의와 평균지권

 

혁명파 《민보(民報)》의 발행인 장빙린(章炳麟)의 일갈(一喝)이었다. 그와 동시대를 산 쑨원(孫文)이 이런 주장에 호응해 내놓은 정치철학이 “민생주의”였다. 그는 이 논지에 따라 지주계급의 봉건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평균지권(平均地權)”을 제안했다.

 

“평균지권”은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그을 뿐만 아니라 땅으로 해서 얻는 소득을 최소화하고 토지소유의 균등을 보장하는 제도였다. 물론 토지의 공적 소유까지 간 것은 아직 아니었다. 농민이 다수였던 당대 중국에서 토지는 평균지권의 단계를 지나면 공적 소유로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쑨원의 민생주의를 소개하는 경우에 이 대목을 언급하지 않는다. 민생과 토지소유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 애초 “민생”이란 민초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그저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토지소유에 대한 혁신적 변화를 꾀하는 정치였다. 이런 정치에서 토지개혁없는 민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쑨원이 평균지권과 함께 말한 것은 “절제자본(節制資本)”이다. 이는 대기업을 국유화 내지 공적 자산으로 만드는 제도다. 당연히 사회주의의 기초적 형태를 지향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그는 민생은 사회주의라고 못박았다.

 

평균지권과 절제자본은 땅과 자본을 어느 한 개인이 거대하게 소유하는 구조는 민생을 위협한다고 본 데서 출발한다. 토지와 자본을 독점하는 체제에 의존하는 정치는 장빙린의 말대로 도둑의 무리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든다. 쑨원이 오늘날에도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까닭은 이와 같은 혁명적 사상과 실천의지 덕분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도 땅의 문제는 “민생”의 핵심이 되고 있다. 토지에 대한 공적 제동장치와 공유지 확대 없이는 투기성 부동산 시장이 상황을 주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으며, 장빙린과 같은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는다.

 

- 땅과 영혼

 

네흘류도프와 농민에게로 돌아가 보자. 토지를 농민들의 공공재로 넘기겠다는 네흘류도프의 약속에 마을 농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농민들은 땅을 각자 자기 것처럼 쓰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임대료만 내면 된다. 그런데도 이런 반응이라 의외였다. 한쪽은 그만하면 괜찮은 거라고 했지만 다른 한쪽은 뭔가 모략이 있는 것 같다며 두려워했다.

 

지주계급에게 한두 번 속아 살아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농민들의 마음을 한 노파가 전격적으로 바꾼다.

 

“지주가 영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나봐. 영적 구원을 얻기 위해 이러는 거야.”

 

네흘류도프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직접 알게 되고 토지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자신이 지난 날 살아온 귀족 생활이 얼마나 “불쾌한 광기”인지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노파의 말대로 해방되고 있었던 것이다.

 

- 아름다운 영혼을 향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땅 기부 운동을 벌이고자 인도 전역을 걸었던 비노바 바베는 “토지의 사적 소유는 반드시 끝나야 한다”며 땅이 공동의 소유가 되는 순간 마을은 한 가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나눔 운동을 펼치면서 “나는 구걸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초대하러 왔습니다.”라고 설득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공기와 물과 햇빛처럼 땅 또한 신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그 땅에 대해 공평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노바 바베는 땅의 공동소유가 인간의 영혼이 신과 만나는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소유에서 해방된 보다 높은 경지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

 

그것이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을 해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도리어 토지 소유를 향한 욕망에 희생될 사생활의 확장과 심화가 이루어진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라는 이름으로 지구 생명공동체의 개념을 설명한 제임스 러브럭(James Lovelock)이나 지구의 영혼에서 신성함을 느끼라고 일깨우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신부의 성찰은 모두 같은 지점을 향해있다. 땅의 생명을 독차지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땅을 자기 손에 혼자 움켜쥐려는 것은 악마와의 계약에 지장을 찍은 자들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영혼은 끝없이 썩고 악취가 난다. 거짓과 사기와 약탈은 이들의 숨길 수 없는 일상이다.

 

땅이란 신의 선물이며 모두의 것이다. 그걸 만드는데 우리가 기여한 바가 없다. 그저 주어졌다. 은총이다, 그건 값을 지불하고 받는 상품이 아니다.

 

봄날의 햇살이 바람을 타고 꽃잎을 어루만지고 있다. 땅에서 자라난 나뭇가지 끝에 피어난 기적이다.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영혼의 거처가 다름 아닌 그곳에 있다. “불쾌한 광기”를 저버릴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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