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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밥맛

 

걸어야 할 운명의 길 같이 아침에도 산길을 걸었다. 갑자기 칸트의 산책에 따른 생각이 떠올랐다. 칸트는 일어나서 홍차 두 잔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산책길에 나섰다고 한다. 동네 사람은 산책길의 칸트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그만큼 그는 정확히 그 길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돌아와서는 달력의 여백에 그날 산책길에서 전날과 달라진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적어두었다. 칸트는 아침밥은 간단하지만, 저녁밥은 자신이 직접 요리하여 네댓 시간 동안이나 즐겼다. 그의 요리는 그 시절 그 시기에 가장 알맞은 음식을 먹는 것이 큰 낙이었다고 한다.

 

나이가 불어날수록 세월의 유속은 불자동차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봄에 새순의 차를 달여 마시면 마음 가벼워지고 두 겨드랑이 밑에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 한 해가 지나가고 내일모레면 차나무 밭에서 풋것의 향기에 취할 것 같다.

 

신춘문예 시상식을 간략하게 마친 다음 날이었다. J 신문 논설위원과 문화부 기자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 어느 음식점 2층 독방에서 만났다. 신춘문예 심사를 하면서 업무적으로 만나 수고한 관계지만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어 만났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입장으로써, 두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k 기자가 먼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분 삶이 재미있었을 것 같다고 했다. L 논설위원도 그분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경제 문제, 언론사의 분위기 등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차례인 것 같아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노동자로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좋아했고, 학자로서는 고하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다’고. 이어서 88올림픽 때의 정주영 회장 활약과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IMF 금융위기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고 말했다.

 

정주영 씨는 젊은 시절 아버지가 소 팔고 상자 밑에 감춰둔 돈을 훔쳐 도망쳐 나와 생명줄을 담보로 하고 월남했다. 미곡상의 자전거로 쌀 배달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산업의 현장에서는 온몸을 던져 닥쳐오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기업을 일으켰다. 그런 재벌 총수가 그분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소 한 마리 훔쳐 온 부채를 갚기 위해 1001마리의 소 떼를 차에 싣고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간 분이다. 이와 유사한 역사가 어느 나라 어디에 있었던가. 어느 재벌의 임자가 통일 비용 한번 통 크게 국가에 헌납한 일이 있었던가. 소 한 마리 값의 이자가 천 마리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간 그의 자서전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다.

 

오래된 일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웃자고 하는 농담 벗들과 만남도 오래 이고, 몇 안 되는 동창과 만남을 연기하다 미루다 지쳐버린 지도 오래된 일이다. 좋은 사람과 만나서 식사하고 차를 마신다는 것은 내 삶의 토양에 관개(灌漑)하는 작업이다. 밥값의 무게가 문제 아니고 유명한 집에서의 만남이 대수가 아니다. 어떤 사람과 무슨 의미를 내포한 말을 교환하며 복된 식사를 하느냐가 문제이다. 모처럼 신춘문예 심사비를 받아서 그들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벚꽃 터널 지나서 어머니 산소에 들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여쭈어보았다. ‘어머니 그곳 밥맛은 어떠신가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