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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광고로 세상 읽기 ] ② 미국의 흑인노예 광고

 

 

- 말을 하는 가축, 흑인 노예-

 

미네소타 경찰관 데릭 쇼빈에 대한 만장일치 유죄평결이 내려졌습니다. 무저항 상태의 흑인 조지 프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살해한 혐의로 말이지요. 이 같은 인종차별문제는 총기문제, 의료보험문제와 함께 미국의 계급적, 구조적 모순을 상징하는 3대 암종(癌腫)으로 불립니다. 오늘은 인종차별의 근원을 되짚어 보는 광고를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18세기 중반 이후 미국 남부의 주요 신문에 빈번이 등장하는 광고 유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고파는 ’것이지요. 이들 콘텐츠는 미국이란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생각과 양심을 지닌 인간을 가축처럼 사고파는 습속이 이렇게까지 성행했던 곳은 이 나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 땅에 최초의 흑인노예가 도착한 것은 1619년 8월. 아프리카에서 납치한 흑인 스무 명을 싣고, 대서양 연안 버지니아 주 포인트 컴포트(Point Comfort)에 화물선이 도착한 거지요. 이것이 미국 노예제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유럽 산(産) 공산품과 서아프리카 지역 현지 노예들을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곧 인력이 고갈됩니다. 이후에는 무장 용병을 고용하여 아프리카 내륙 중심부까지 침입한 다음, 아예 강제 납치 형태로 수요를 충당하기 시작했지요. 알렉스 헤일리의 장편 소설 《뿌리(Roots)》에 생생히 묘사된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16세기 초부터 1860년대까지 약 1250만명의 흑인 노예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송되었고 항해 도중 15퍼센트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비인간의 극치인 이런 제도가 왜 미국에서 성행했을까요? 산업 구조의 지역적 편차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 비해 50년 정도 산업혁명이 늦게 시작되었지만 미국 북부 지역은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지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남부지역은 여전히 농업이 생산력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면화, 담배,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이 주력 산업이었던 거지요.

인간의 육체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이들 농장 소유주들에게 노예는 단순한 소유물을 넘어선 존재였습니다. 경제 전체를 책임지는 ‘살아 움직이는 생산도구’였던 겁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제 노동력이 절실했던 북부와 농업 중심의 남부가 노예제도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두 지역 간의 정치경제적 충돌을 불러왔고 남북전쟁 발발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 최고 등급의 건강한‘니그로(Negro)’를 팝니다-

 

노예광고는 크게 2종류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순수한 판매 목적이지요. 아래에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미국이 아직 식민지 상태였던 1769년 7월 24일에 집행된 겁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남동부의 찰스턴은 노예 무역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곳. 이 도시의 한 신문에 게재된 광고는 지면 좌우측에 남녀 흑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대칭적으로 레이아웃 했습니다. 그 아래 자그마하게 아이들 그림까지 그려놓았네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성인남자, 소년, 성인여자, 여자아이로 구성된 총 94명의 노예들이 지금 막 아프리카에서 도착했다는 겁니다. 이들은 모두 (쇠고기 등급을 매길 때나 쓰는 단어인) 최상급(prime)의 건강한 상태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대서양 횡단 항해는 1달 이상이 소요되었지요. 그러한 노예 운반선의 상태는 참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선내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여 사람을 화물처럼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소나 말도 이런 상태로는 견딜 수가 없지요. 발목에 차꼬를 채운 상태에서 벌린 입에 물과 음식을 넣어주고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보게 했습니다.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나갔습니다. 이렇게 도착한 흑인들을 바로 시장에 내놓아 가축처럼 가격을 매겨 사고판 겁니다. 강제노동을 통한 잉여가치 생산을 체제 유지 기반으로 삼았던 한 사회의 비인간적 본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아메리카 판 추노(推奴) 광고-

 

두 번째 유형은 도망간 노예를 잡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1793년과 1850년 두 번에 걸쳐 발효된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Law)이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 법률은 도망친 노예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잔혹한 추적을 허용하였습니다. 심지어 도망노예를 도와준 사람까지 처벌하는 희대의 악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탈출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인간은 가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절망적 삶을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겁니다. 이런 케이스가 급증하자 전문적인 노예사냥꾼들이 나타났습니다. 지난 2010년 KBS2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연속극 '추노(推奴)'를 기억하시는지요? 거기 등장하는 활극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겁니다. 동시에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신문 광고가 하루가 멀다 않고 등장합니다. 이들 콘텐츠에는 값비싼 ‘내 물건’을 되찾고야 말겠다는 노예 소유주들의 이글거리는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1793년 게재된 다음 신문 광고를 보시지요. 벨파스트란 이름의 흑인남자 노예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스물일곱 나이에 5피트 8~9인치의 신장, 특히 이빨이 매우 하얗다고 표현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마치 우(牛)시장의 소를 설명하듯 말이지요.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길로틴에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민중혁명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정신이 전 세계에 선포된 겁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런 반문명적 작태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거지요.

 

노예를 잡아오는 사람에게 소유주 마이클 월레스가 현상금 20달러를 준다는 내용이 적혀있네요. 당시 달러 가치를 오늘날의 그것으로 정확히 환산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 미국 육체노동자 일당이 평균 1.5달러 정도였으니, 그 60년 전 20달러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큰 금액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소문난 범죄자에 대한 현상금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흑인 남자 노예 ‘환수(還收)’에 걸린 돈이 이 정도였던 겁니다.

 

광고의 왼쪽 상단에 묘사된 그림은 거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쇄수준의 한계를 뚫고 전달되는 파토스가 강렬합니다.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뒤를 돌아보며 황급히 달아나는 청년의 표정을 보십시오. 추적자에 대한 두려움이 선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사회’를 이보다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언은 드물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예 광고는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광고는 당대의 풍경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간의 통조림’입니다. 그 점에서 이들 콘텐츠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근원과 야만적 자본주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적시하는 귀중한 사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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