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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손님 막으려다 망한 부잣집… 밭만 남은 ‘의왕시 월암동 안터마을’

의왕시 월암동은 다양한 곳에 속해있던 지역 중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광주목 월곡면의 일리와 이리였다가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 ‘지방구역 정리 건’에 의거, 안산군 월곡면 월암리가 되었으며,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반월면 월암리로 변경됐다.

그러다가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반월면 월암리로 바뀌었으며, 1989년 1월 1일 오늘날의 의왕시 월암동으로 변경됐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광주목 월곡면의 ‘월(月)’자와 마을을 둘러싼 산에 바위가 많아 ‘암(岩)’자를 따서 ‘월암동(月岩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월암동에는 안터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인가 한 채 없이 널따란 밭이 있을 뿐이지만, 과거에는 상당히 부유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그 부잣집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안터마을에는 날마다 이곳 저곳에서 손님들이 와 언제나 식객들로 붐비는 부잣집이 있었다. 넉넉히 살고 있어 손님을 막지는 않았지만, 부잣집 주인의 마음은 많은 손님으로 인해 짜증이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금강산에서 내려왔다는 한 스님이 대문 밖에서 염불을 염송하며 시주를 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손님들의 치다꺼리에 마음이 안좋았던 주인은 스님에게 한마디를 했다.

 

“스님, 보시다시피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그냥 가시오.”

 

“나으리 인덕에 이렇게 손님이 많은 것도 부처님의 은덕이 아니오리까? 여기에 다소간의 시주를 베푸시는 것 또한 소승에 대한 보시가 아니겠습니까?”

 

“손님들이 모이는 것이 부처님의 은덕이라고요? 그럼, 내 이번에 시주를 아주 많이 하겠으니, 부처님께 내 소원을 올려주실 수 있겠소?”

 

“어떠한 소원이신지요?”

 

“내 요 근자에 이르러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치지 않아 골치가 아프니, 제발 그 손님들이 오지 않도록 불공을 좀 드려 달라는 소원이요.”

 

“나으리께서 그것이 소원이시라면 해 드리지요.”

 

이에 주인은 곧 하인을 시켜 광에서 쌀 한 말을 담아 건네주게 했고, 생각보다 많은 양에 놀란 스님은 고마움을 담아 인사했다.

 

“그런데 스님, 이제 우리 집에서는 앞으로 다시 시주가 없을 것인 즉, 그리 아시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놀랐다. 넉넉히 살고 있어 손님들이 웬만큼 모이더라도 살림에는 별 걱정이 없을 것임에도 이를 인색한 마음으로 귀찮게 여기고, 쌀 한 말의 시주로써 그 손님들을 못 오게 해달라는 청도 우스우려니와 다시는 오지 말라는 주인의 인색함에 놀란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소승은 이제 다시는 댁에 들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다시 댁에 모이지 않게 하는 좋은 수가 있습니다. 댁에 들어오는 이 소로길을 배로 넓히시고, 굽은 길목을 곧바로 잡으십시오.”

 

주인은 이 말을 그럴듯하게 생각하고, 스님이 일러준 대로 길을 넓히고 굽은 길목을 바로잡으며 큰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길을 고치기 전보다도 손님들이 더 몰리기 시작했다.

주인이 손님들이 출입하기에 편하라고 길을 넓히고 고쳤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부잣집은 어무 많은 손님들의 치다꺼리에 살림이 줄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서 그만 망해버렸다. 그리고 부잣집에 딸려 살던 이웃집들도 하나 둘 다른 곳으로 옮겨가 지금처럼 넓은 밭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 경기신문 = 이상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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