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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창] 유두고여, 부활하라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전도자 바울이 드로아에 왔다. 드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 도시로, 트라야누스 황제가 만든 도수교(導水橋)가 명물이었다. 초대교회 풍경이 대개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아무개의 집에서 일요모임이 열렸다. 밤이 깊도록 바울의 강론이 이어지는데, 한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 몹시 졸다가 그만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강론이 중단된 건 당연지사.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청년을 일으키려 하지만, 아뿔싸, 숨을 쉬지 않는다. 어쩌자고 이 청년은 그토록 위험한 장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을까? 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일찌감치 모임에 왔더라면 안전한 자리를 선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늦게 온 탓에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얼마나 정신없이 졸았기에 땅으로 떨어지는가?

 

이 청년의 이름은 유두고. ‘유두고’는 헬라어로 ‘행운’이라는 뜻이다. 그 시절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고 하니, 소름이 돋는다. 노예를 행운이라고 부르는 건 철저히 자본가의 시각일 터. 그러니까 유두고는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게 붙들어둔 욕심 사나운 주인 밑에서 온종일 일한 뒤, 느지막이 모임에 참석했으리라. 자리가 없어 겨우 3층 창문턱에 비비고 앉았는데, 천근만근 쏟아지는 눈꺼풀의 무게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거라. 그러다 추락사를 당했다.

 

어째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이 땅에도 커피 한 잔 값에 목숨을 저당 잡힌 청년들이 수두룩했다. 청계천 피복 노동자였던 스물두 살 전태일이 그중 하나다. 그는 이 땅의 수많은 유두고를 대신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80달러에서 3만 1천 달러로 경이로운 수직상승을 기록했다. ‘케이팝’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데도 왜 청년들이 아직도 죽어 나가는가? 어째서 청년에게 할당된 자리가 여전히 위험한가? 5년 전, 열아홉 살 김군은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열차에 치여 죽었다. 3년 전, 스물네 살 김용균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운송설비를 점검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죽었다. 그리고 지난달, 스물세 살 이선호가 평택항에서 검역 관련 ‘알바’를 하다 300킬로그램짜리 컨테이너에 깔려 죽었다.

 

다시 성경 속 유두고를 만나보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그는 어찌 되었나? 바울이 내려가서 그의 몸 위에 엎드려 끌어안으니, 마침내 유두고는 다시 살아나 집으로 돌아가고, 그 도시 사람들은 적잖게 위로를 받았다.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라고 밀쳐낼 일이 아니다. 한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하지 않고 기꺼이 다가가 그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포갠 행위, 곧 그의 존재와 운명에 깊이 공감하며 연대한 것이 기적을 낳았다. ‘좀비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자비다. 이선호가 없는 오월은 더 이상 푸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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