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서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언론사는 어디일까. 조선일보다. 콘텐츠가 풍부하고 보도가 균형 잡혔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구제불능의 극우매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안티조선' 운동이 그러한 시각의 상징이었다.
이 신문이 대형 사고를 쳤다. ‘성매매 관련 기사’를 쓰면서 조국 교수와 딸의 삽화를 함께 내보낸 것이다.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참담함을 토로했다. 하물며 이런 모욕을 당한 당사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자칭 ‘1등 신문’이 공개적 인격살인을 저지른 게다.
검찰개혁 국면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조국과 그 가족에 가해진 보수 언론의 광기어린 공격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집요했다. 그의 법무부 장관 임용설이 제기된 지 3개월 만에 “조국”을 키워드로 하는 온·오프 보도가 100만회를 넘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허위, 과장, 왜곡이 세상에 흘러넘쳤다. 하지만 이번의 조선일보 보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수준이다. 인간성과 가족의 마음에 대한 난도질이기 때문이다.
보도가 나간 지 두 시간 반 만에 해당 신문이 그림을 바꾸고 사과를 내놓기는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역시 조선은 조선일 뿐이다. 사태의 핵심 원인을 담당기자의 실수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회사 차원에서는 그저 “관리감독 소홀”을 말할 뿐이다.
2.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란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있다. 언론사에서 보도뉴스를 내보낼 때 다양한 층위의 내부 조직 차원에서 기사 내용에 대한 개입, 수정, 허락 절차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일보가 올린 사과문은 어이없는 꼬리자르기다. 명색이 ‘조국’이 관련된 기사에 대해 조선일보가 그리 무신경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만드는 학교신문도 그렇게는 안 한다. 기사 작성과 비주얼 선정 그리고 최종 보도 결정이 취재기자 단독으로 결정될 가능성은 단 1%도 없다고 본다.
이미 작년 8월 조선일보는 조국 교수 딸에 대한 악질적 오보를 내고 사과를 한 적이 있다. “세브란스병원 피부과 인턴 지원”운운의 기사 말이다. 그럼에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한층 악질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무고한 일가족을 공격한 것이다. 비단 조국 교수 가족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한 언론사가 ‘특정인에 대한 감정’을 이런 수준의 사적 린치(lynch)로 해소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나라 언론의 존재가치는 영원히 시궁창에 처박혀버릴 것이다.
작년 8월 한국기자협회가 국내 언론사 현직기자 6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영향력과 신뢰도가 가장 높은 언론사로 조선일보가 뽑혔다. 언론계 종사자들에게 냉정하게 묻고 싶다. 과연 이 신문의 오늘이 그러한 높은 평가를 낯붉히지 않고 받을 수준인가? 조선일보의 보도 행태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동종 언론계에서 엄혹한 비판을 제기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해당 기사는 특정인을 겨냥한 심각한 성적, 반(反) 인격적 모멸을 담고 있다. 여성단체와 인권단체에서도 묵과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3.
조국 교수는 sns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국회의 징벌적손해배상제 입법을 촉구했다. 그러므로 이 기사에 문제의 삽화를 선택한 자는 누구인가? 게재를 허락하고 결정한 최종적 게이트키퍼(gatekeeper)는 누구인가? 그 위의 또 그 위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이번 보도의 책임 추궁이 결코 몇 줄 사과문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보도기자, 데스크, 편집책임자와 사주에 이르는 구성원 전체에 대하여 최고 수준의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작년 세브란스병원 오보 때 뿌리를 뽑지 않았으니 이런 도발을 되풀이하는 게다. 개인과 가족의 영혼을 반복적으로 짓밟는 이 같은 악행에 대해서는 회사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엄혹한 징벌이 실행되어야 한다. 다시는 서툰 짓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중국의 소설가 루쉰(魯迅)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유명한 글에서 물에 빠진 개는 더 두들겨 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물에 빠진 개가 물에서 나와 다시 사람을 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참으로 대단한 착각”이기 때문이라고.
함부로 사람을 무는 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쉰의 예를 따라 무조건 두들겨 패야 한다. 그리고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입마개를 씌워야 한다.
언론이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책임과 보도윤리를 망각하고 사적 감정의 발산을 위해 아무나 물어대면 그것은 광견이나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구성원 모두가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나 자신이 개의 이빨에 물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