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마흔이다. 스물아홉에 고향 함경도 청진을 떠났다. 대부분의 탈북민들처럼 그도 몇 개국을 경유하여 목적지 서울에 도착했다. 태영호나 지성호처럼 황송한 신분(국회의원)이 된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어렵게 산다.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는 이화여대 국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에서 공직자로 일하던 남편을 만나 가족을 이루었다. 그리고 2년간 일본에 살면서 남편과 함께 통일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신촌에서 네 살 된 딸 하나와 다복하게 살고 있다. 객관적으로, 탈북민들 가운데 이 정도로 안착한 경우는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빛나는 명함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좀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는 정치 경제 분야에서 세속적으로 크게 성공한 소수의 탈북자들과 질이 다른 성취를 해왔다. 이는 점점 더 탄탄해지고 규모도 더 확장되고 있다. 그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눈 뒤에, 그에게 도움될 천사들을 모으는 중이다.
지금 남쪽에는, 목숨 걸고 가족과 삶의 터전을 떠난 뒤, 과장 없이 지옥을 건너서 마침내 서울에 들어온 북쪽 이주민들은 3만 5000명(2020년 기준)이다. 그 중 2/3는 여성이다. 그 가운데 대학생은 2천 명이 넘는다. 소위 '탈북자 특별전형' 경쟁률은 20:1쯤 된다.
그는 그 가운데 18명의 이화여대 후배들에게 기숙사를 제공하고 돌보고 있다. 무료다. 작지 않은 공동체이니 비용도 적지 않다. 동생들과 함께 알바를 하여 비용을 보탠다. 물론 태부족이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탈출했던 친구들이다. 언제나 듬직하다. 남편의 든든한 지원과 시부모님의 이해와 격려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눈물겹게 고맙다. 존귀한 아군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가 예명으로 지어주신 다혜(多惠)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많은(多) 혜택(惠)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북쪽 사람들에게 남쪽에서 받은 은혜를 손 크게 돌려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거나, 남북 간에 통행과 통상이 가능하게 될 날을 대비하여, 그는 회사를 설립 중이다. 조선김치(북한김치) 사업체다. 친정어머니가 1급 요리사였다. 그 솜씨를 보고 배운 덕분에 1차 테스트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선, 지금 함께 사는 동생들에게 평생직장을 주고 싶다. 그다음, 일본에서 그린 '그림'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려 한다.
내가 말했다.
"신자유주의 세상은 표독하고 난폭하다. 누가 다치거나 죽어도 기계처럼 처리한다. 그 회사는 항상 훈훈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식구가 많은 직원에게 월급 좀 더 주고, 누가 아프거나 다치면 가족처럼 돌보고. 성한 사람이 일 좀 더하고. 경쟁 없고. 촌스럽게..."
여유 있는 남쪽 사람도 감당키 어려운 일을 김다혜가 해내고 있다. 그 성공의 증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