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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가볼만한 '천림산 봉수(天臨山 烽燧)'… "코로나 종식 '평안화(平安火)'를 고대하며"

천림산은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청계산(해발 616m) 동쪽 기슭에 금토동 일대 해발 170m 높이 구릉같은 산이다. 조선시대 조성돼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경기도 내 마지막 봉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추석 연휴 수도권 내에서 둘러볼 수 있는 천림산 봉수지를 소개한다.

 

 

봉수는 변방의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려 군민(軍民) 합동으로 대비하기 위한 국방통신시설로서 밤에는 횃불(烽, 火)로, 낮에는 연기(烟, 燧)를 피워서 신호를 전달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화포나 북, 각성(角聲, 나팔) 또는 깃발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했다. 이 때 연기를 피우는 데에는 이리 똥을 사용했기 때문에 낭화(狼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했다.
 
봉수제도는 고대 국가 형성 시기에 영토전쟁이 벌어지면서부터 시작됐는데, 봉수제도와 관련해 전해지는 중국의 설화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해 준다.
 
서주(西周) 유왕(幽王)이 몹시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 포사는 도무지 웃지를 않았는데, 마침 봉화가 오르니 지방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황급히 집결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보여줬다. 이에 포사의 웃음을 보려고 세 번이나 거짓으로 봉수를 올렸다. 그런데 신후(申候)가 견융(犬戎)족을 이끌고 주나라를 공격해왔는데, 봉화를 올렸으나 이번에도 장난이라 생각한 제후들이 군사를 출동하지 않아 주나라는 멸망하게 됐다.(史記 周本紀) 양치기 소년이 "늑대다"라고 장난쳤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평화시 1개의 신호를 '평안화', '태평화'라고 불렀고, 지방에 가족들이 가 있는 경우 평안화를 보면서 안심을 했다. 봉수를 올리는 시설을 봉수대(烽燧臺) 혹은 봉대, 연대(煙臺)라고 하며, 국가에서 정치적·군사적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되고 운영됐는데, 간혹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봉화를 올렸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봉수제도는 전국에 다섯 개(5炬)의 직봉(直烽)노선을 배치하고, 직봉노선 사이를 연결하는 간봉(間烽)노선을 설치해 마치 거미줄처럼 전국을 통신망으로 연결했다. 바닷가에는 연대를 설치하고, 내륙에는 내지봉수 또는 복리봉수(腹裏烽燧)를 배설했고, 한양 목멱산(남산)에서 전국의 신호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했다. 천림산 봉수는 두 번째 직봉노선의 마지막 전달 봉수였다. 이 노선은 부산 다대포진 응봉(鷹峯)에서 시작돼 용인 석성산 봉수를 거쳐 성남 천림산 봉수에서 목멱산 봉수로 신호를 전달했다. 천림산 봉수는 석성산 봉수와 18.75㎞, 남산 봉수와는 16㎞ 거리이다.
 


‘경국대전’에 일상적인 평화가 지속되는 날에는 홰 1개를 올리고, 적이 멀리 나타나면 2홰, 경계에 가까이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전투가 벌어지는 긴급상황이면 5홰의 봉수를 올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5진법의 봉수 신호 전달체계는 세계 최초로 구축된 과학적인 마이크로웨이브 통신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 TV방송을 처음 시작할 때 일본의 기술자문을 받았는데, 일본의 전문가들이 가져온 첨단 자료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봉수대 지도였다. 봉수대가 있던 부근에는 여러 통신 회사가 설치한 통신 중계시설이 설치된 곳이 많다.
 
우리나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봉수제도가 있었다.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유천간(留天干)에게 망산도 앞 바다에 나아가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을 시켜 승점(乘岾-輦下國)으로 나아가게 해 붉은빛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를 횃불로 안내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에 738개의 봉수가 있다고 기록돼 있고, 천림산 봉수는 천천산(穿川山) 봉수, 천천현(穿川峴) 봉수, 월천현(月川峴) 봉수 등 여러 명칭이 전해오는데, 조선 후기부터 천림산 봉수로 불려졌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 기록으로 보면 천림산 봉수는 조선 초기에 축조됐고, 1846년에 홍경모가 편찬한 중정 남한지(重訂南漢志)에 봉수군은 25명으로 5명씩 한 조를 이루어 5교대로 근무했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장(伍長)이 관리 감독 현장책임자였다.
 


천림산 봉수는 문헌기록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통일기원 전국 봉화제가 열렸는데, 고희영 전 성남시의회 의원이 주도해 성남문화원과 공동으로 제1회 봉화제를 개최했다. 그런데 제1회 봉화제는 인릉산 ‘봉화뚝’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개최됐고, 제2회 봉화제를 준비하던 중 금토동 원주민 윤효상 씨가 천림산 봉수 위치를 제보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에 성남문화원이 봉수 관련 학술회의를 전국 최초로 1999년 10월 1일 개최해 학술적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LH 토지박물관에 의해 2000년 4월 정밀지표조사와 다음 해에는 봉수터와 건물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경기도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됐다.

 

그 후로 성남문화원에서 여러 차례의 학술세미나와 토론회를 개최했고, 김주홍과 윤종준 연구위원 등이 전국의 봉수 실태조사와 문헌기록 조사를 통하여 ‘한국의 봉수 40선’, ‘봉수 문헌 자료집’을 발간했으며,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발표되는 등 복원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러던 중 김대진 성남문화원장과 박창순 경기도의원의 노력으로 예산이 확보돼 2019년 9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갖게 됐다. 굴뚝 5기 중 4기를 복원하고 1기는 그대로 보존했다.

 

준공식 날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을 재현했는데 성남시 학예사들과 성남문화원의 김주홍, 윤종준 연구위원이 옛날 문헌 기록을 철저히 고증해 솔잎, 쑥, 소똥, 말똥, 심지어 이리 똥까지 구해 재현에 성공했다. 1995년 위치확인 24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였고, 다른 지역 봉수 복원의 모델이 됐다. 코로나 4단계 시대에 평안화의 뜻을 살려 하루빨리 다시 평안화 오르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 자료제공=성남문화원 부설 성남학연구소 윤종준 박사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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