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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위기의 집단지성

 

이즈음 집단지성이란 말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유행어였는데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국 사회의 큰 에너지로 작동한 집단지성이 왜 이렇게 쪼그라든 것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집단지성은 SNS 환경에서 태어났다.

 

손에 쥔 개별화한 디지털 기기로 세상에 참여해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 마셜 매클루언에 따르면 모바일이라는 새 미디어는 개인의 발견이다. 객체가 아닌 주체, 수동이 아닌 능동. 주체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걸러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집단지성은 사회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통해 간선이라는 과두 체제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오죽했으면 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집단지성을 대놓고 비난했을까? 송 대표가 언급한 속칭 '대깨문'은 어쨌거나 SNS에 기반한 집단지성의 한 흐름이다. 그만큼 정치권에 있어 집단지성은 눈엣가시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 무관하게 집단지성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정치 논의가 활발해지기 마련인 대선 정국에서 새로운, 응집된 논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코로나19의 영향을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다.

 

한병철 선생은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주민은 집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우리를 생성해낼 수 있는 집회의 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디오와 같은 전자 매체가 사람들을 집결시킨다면,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따로 떼어 놓는다"(131쪽)고 고찰한다.

 

여기에서 디지털의 한계는 오프라인이 보완할 수 있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SNS에서 집결한 시민들은 검찰 개혁 서초동 오프라인 시위를 통해 '하나의 우리'를 생성해 냈었다. 그런데 팬데믹이 집회를 원천봉쇄해 집단지성이 반쪽이 된 셈이다.

 

아울러 정치권의 고질적이고도 고착화한 프레임인 진영논리에 매몰된 것도 큰 원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조짐은 지난 4·7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과정에서 일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민심이 이반한 것도 모른 채 오직 수구정당 후보 불가론만 외친 결과는 참담하다 못해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대선 정국인 지금도 그 연장선으로 보인다. 진영논리는 반지성 논리다. 두 정치 그룹의 자기생존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정치권의 논리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맹목이자 기회주의다. 민주주의의 적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이른바 개돼지로 가둬놓는 꼴이다. 진영논리에 기대는 집단지성을 어찌 집단지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발견이라는 새 미디어 정신으로. 나의 발견은 내가 노예가 아닌 내 삶의 주인이라는 천명이 아닌가? 그러니 진영논리 따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주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통스럽더라도 내 힘으로 얽히고설킨 세상을 읽어야 한다. 내가 자유로운 개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타자와의 연대가 가능하다. 집단지성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로 가기 위한 지름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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